"충주는 고구려 역사문화 종주도시 자부심을"

[충청일보] 지난 19일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개관을 계기로 웅혼했던 고구려의 기상이 1500년의 시간을 건너 충주에서 눈 뜨고 있다. 국내 유일의 고구려비인 충주 고구려비는 33년 전 중원문화권을 무대로 유적 탐사에 몰두했던 아마추어 향토문화 연구모임 '예성문화연구회(옛 예성동호회)'에 의해 발견됐다. 당시 초대회장이었던 유창종 변호사(67·법무법인 세종 중국본부장·사진)는 대검 중수부장을 지낸 마약통으로 명성을 날리면서도 삼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와당 연구에 천착해 일가를 이룬 미술사학자이자, 세계 최고수준의 와당컬렉션을 보유한 수집가이기도 하다. 지금도 국내와 중국에서 동아시아 문화 특강을 통해 고구려 문화의 우수성을 전파하는 그에게 충주 고구려비 발견의 뒷얘기와 고구려 역사문화 종주도시를 꿈꾸는 충주의 앞길을 물어봤다. /편집자주

△충주 고구려비 발견 경위는
청주지검 충주지청에서 1년간 근무를 마치고 의정부 지청으로 전보 발령이 나서, 1979년 2월 25일 토요일에 예성문화연구회 회원들과 같이 저를 위한 환송답사를 나갔다가 고구려비를 발견했다. 귀갓길에 입석마을 어귀에 세워진 백비(글자가 없는 비석)를 보고 가자는 제안에 따라 마을에 들어설 때 석양빛에 글자 비슷한 인공흔적을 발견하게 됐다. 바로 황수영 박사님께 전화로 알려드렸더니 4월5일 황 박사님이 제자인 정영호 박사와 함께 서울에서 내려와 탁본하고, 더 많은 글자가 확인되고, 여러차례 회의와 연구결과 고구려비로 확인됐다.

△발견 당시 에피소드가 있다면
예성문화연구회는 당시 진흥왕순수비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입석마을 백비에 글자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회원들은 '드디어 진흥왕순수비를 찾았다'고 환호했다. 황 박사님께 소식을 전할 때도 '진흥왕순수비를 찾았습니다'고 말씀드렸다. 1979년 4월5일 충주에 내려온 황 박사님은 시내 다방에서 회원들과 함께 계셨고, 정 박사님은 학생들과 함께 백비를 탁본하러 갔다. 탁본 현장으로부터 더 많은 글자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황 박사님은 흥분한 나머지 담배를 거꾸로 물기까지 하셨다.

△전시관이 문을 열었는데
지금이라도 전시관이 건립됐다니 발견에 기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감개무량하기 짝이 없다. 전시관 건립을 계기로 충주 고구려비의 훼손을 방지하는 기본적인 목적 이외에 충주 고구려비의 역사적 의의를 국민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전시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충주 고구려비와 장미산성, 햇골산 마애불상군, 중앙탑, 탄금대, 남한강과 충주 주변 지역의 유적을 연결하는 전국적 차원의 문화체험 프로그램과 청소년 역사 탐방프로그램을 개발해 활용하기를 권유하고 싶다.

△고구려비에 애착이 클텐데
충주 예성 성돌 발견, 햇골산 마애불상군 발견 등을 경험하면서 충주와 중원의 향토문화 애호가로 변신하던 중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 발견이라는 참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행운을 맛봤다. 1996년 순천지청장 재직 시 국보 274호 별황자총통이 가짜임을 밝혀내는 수사를 성공시킴으로써 평생 진짜 국보도 찾고 가짜 국보도 찾는 별난 이력을 갖게 됐다. 1999년 청주지검 검사장으로 발령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충주 고구려비였고, 부임 직후 바로 충주 고구려비를 방문했을 때 감회가 깊었다.

△예성문화연구회는 어떻게 조직됐나
충주시민들이 찾아 헤매던 고려 때 축성된 충주성(일명 예성(蘂城))의 성돌을 1978년 9월5일 발견했다. 회원들과 같이 저녁을 먹던 음식점 마루 앞 섬돌(집채의 앞뒤에 오르내릴 수 있게 놓은 돌층계)에 문양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다음날 그 돌을 구입해왔다. 검사가 구입해간다는 사실을 알고 주인은 그냥 가져가라는 것을 억지로 대금을 지급하고 사 왔다. 물로 흙과 때를 닦아내니까 아름다운 꽃문양 조각이 역력했다. 신영훈 선생님을 모셔다 감정한 결과 예성의 신방석으로 판명이 났다. 중앙지 문화담당 기자들까지 몰려와 취재하면서 누가 발견했느냐고 묻는 바람에 이름도 없던 답사 모임 이름을 예성동호회로 정하고 내가 회장, 김예식 당시 중원군 공보실장이 간사가 됐다. 충주 성돌은 충주지청에서 이임할 때 충주시에 기증해 지금은 충주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을 것이다.

△수집활동을 지금도 계속하는지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이 시작된 이래 외국인 특히 한국인들의 고구려 관련 유적탐사조차 제한하고 있다.
고구려 유물을 포함해 발굴 유물은 유통은 물론 해외 반출이 엄격히 제한돼 있어 수집하더라도 반출할 방법이 없다. 다만 2009년부터 중앙미술학원 등 유명 대학에 '와당을 통해 본 동아시아의 문화교류'를 주제로 특강을 다니면서 고구려의 문화적 우월성을 홍보하고 있다. 고구려의 와당문화는 매우 독창성이 있고 예술적 품격이 높으며, 국제적 성격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당시 중국 남북조의 와당과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고, 도리어 고구려가 중국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는 것도 있다. 2005년 일본인 이우찌 선생님이 소장하던 고구려 와당 수백 점을 인수받아 현재 유금와당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이우찌 와당은 세계 최고의 한국와당 컬렉션이기 때문에 정리가 끝나는대로 고구려 와당 전시회를 개최해볼 계획이다. 충주 탑평리와 제천 장락사지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와당 중 고구려 와당의 영향을 받은 것이 있어 이들과 고구려 와당을 함께 전시할 기회가 있다면 매우 의의가 클 것이다.

△동북공정에 대한 생각은
단순히 한국 고대사의 일부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국문화의 뿌리라고 믿어온 황하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더 발전된 문명과 문화의 유적과 유물이 중국 동북지방에서 거듭 발굴되기 때문에 이 새로운 발굴 결과를 어떻게 중국의 역사로 수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중국문명과 문화사의 일대 수정 계획인 것이다. 고구려나 발해 등 일부 역사의 재해석에 대해 단편적이고 일차원적인 반발과 대응을 하는 것은 큰 효과가 없다. 민족주의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은 사태를 해결하기는 커녕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중국이 동북공정을 할 수 밖에 없는 근원적인 사태를 이해하고, 그들이 고민하는 새로운 수정 내용과 방향을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 한국 전문가들도 중국 동북지방에서 새로 발굴되는 유적과 유물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와 이 지역에 고대부터 거주했던 민족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등을 통해 대응 전략을 종합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충주 시민들에 대한 당부라면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개관을 계기로 충주시민들이 충주가 고대 이래로 한반도의 중심 지역으로서, 다른 지역과는 다른 매우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켜왔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구석기시대 이래의 유물과 유적이 충주와 주변 지역에서 발굴되고 있으며, 특히 삼국시대에는 삼국의 접경지역으로 삼국 문화가 융합하는 문화적 특성이 분명하다. 충주 고구려비의 주변인 탑평리 출토 삼국시대 6엽연화문와당의 3종류는 이런 삼국문화 융합의 흔적이다.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러 축성된 예성도 충주문화의 우수성을 증명한다.30여 년 전부터 이런 독특한 문화를 예성문화연구회에서는 중원문화권이라고 명명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전시관 개관을 시작으로 충주시 당국도 이런 독특한 지역의 문화적 특성과 장점에 대한 시민들의 자부심을 높일 수 있는 여러가지 교육프로그램들을 개발해 활용하기를 간곡히 권유하고 싶다.

/대담·정리=이현기자

▲ 유창종 예성문화연구회 초대 회장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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