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서 공자와 여래가 만났다고 상상하면 거의 환상적인 즐거움을 준다. 공자는 여래를 몰랐을 것이고 여래도 공자를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로부터 연유된 말이나 여래로부터 연유된 말을 듣다보면 서로 만나서 의견을 나누면 서로 통하는 미소를 지었을 것이라고 상상된다. 유교가 다르고 불교가 다르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생각은 서로 통하고 있다.

삶이란 고(苦)가 아니냐고 확인한 여래는 일생을 불쌍히 여겼고 삶이란 뜻있는 것으로 여겼던 공자는 인간과 그 삶을 믿었다. 물론 여래는 현실의 무상함을 앞세워 죽음 뒤의 세상을 많이 설파했지만 그 깨우침의 경지는 생사가 없는 절대의 경지이다. 그러나 그러한 절대의 경지를 공자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실토한다. 살아가고 있는 문제도 잘 못 풀면서 죽음 뒤의 문제를 어찌 알 것이냐고 공자는 밝힌다.

공자가 여래를 만난다면 어디가 좋을까? 보리수나무 밑이어도 될 것이고 길거리여도 된다. 여래는 항상 고생하는 천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려고 궁궐을 뛰쳐나와 천하를 돌아다녔다. 공자는 백성을 고생하도록 하는 폭군들을 고쳐 보려고 이 나라 저 나라의 임금들을 만나려고 천하를 돌아다녔다. 여래가 궁궐에서 나온 것이나 공자가 궁궐을 찾아다녔던 것이나 그 뜻은 다 같다.

세상 사람들이 고통 없이 살 수 있게 하려고 그렇게 했던 까닭이다. 그저 공자와 여래가 길가에서 서로 만났다고 상상하자. 여래가 자비로운 미소로 공자를 맞이하면 공자는 예를 갖추어 응대한다. 항상 미소를 머금은 여래의 얼굴을 보고 공자는 마음이 편하고 항상 겸허한 공자의 모습을 보고 여래 또한 마음이 편하다. 이처럼 깨우친 사람들이 만나면 허물이 없어진다. 본래 공자가 말하는 대인이나 여래가 설파하는 보살은 마음이 넓고 깊고 커서 옹졸하지가 않다. “사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태어나 병들고 늙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애처롭기 짝이 없습니다. 이러한 운명의 구속에 걸려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놓치고 사는 중생들이 불쌍합니다.

이러한 지경을 넘어서 그러한 고통이 없는 경지로 안내하려고 모든 중생에게 다음처럼 알려줍니다. 바르게 보라(正見), 바르게 닦아라(正道), 바르게 마음을 써라(正念), 그리고 바르게 다짐하라(正定), 그러면 누구나 자비로운 사람이 되겠지요.” 이렇게 여래가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간이 되는 길을 말한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도 동감이란 표시일 것이다. 인간의 길을 닦자면 그 길은 바른 것(正)이 되어야 하고 곧은 것(直)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도 인간의 길을 다음처럼 밝힌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지요. 해야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음을 알면 누구나 수치스러워할 줄을 압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은 그 몸가짐이 바르고(其身正), 살아가는 것이 곧고(人生直),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같게 되는 경지(正名)에 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누구나 어진 사람이 되겠지요.” 공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자 여래도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도 여래가 공자의 말에 동감을 표시하는 눈짓일 것이다. 모든 중생에 자비하라는 여래의 말이나 나보다 먼저 남을 사랑하는 공자의 말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인의예악(仁義禮樂)이 어떻고 공색해탈(空色解脫)이 어떻다고 서로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없다. 깨우치고 나면 모든 것이 꿈처럼 허무한 것이고 짓는 없(業)마다 고통스럽게 한다고 해서 삶을 포기하고 죽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살 바에야 잘 살아야 하고 제대로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어떻게 하면 제대로 살 수 있단 말인가? 바르게 보라고 한 여래의 말이나 바르게 몸가짐을 하라는 공자의 말이나 다 같이 그 방법이 급소를 찌르고 있는 셈이다.

위와 같이 말해주는 여래나 공자를 마음속에 초대하여 서로 대담을 나누게 하면 사는 일이 유유해지고 든든해진다. 어느 세상에서나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문제이다. 행복도 사람의 손에 달려있고 불행도 사람의 손에 달려있다. 물론 행복만 탐하고 불행을 멀리하고 싶은 소망이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얽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서 공자와 여래가 만나주어 마음속이 후련해진다. 이렇게 공자와 석가여래가 서로 만났다고 상상하면 할수록 캄캄한 세상이 밝아올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길을 닦았고 여래는 부처님으로서 해탈하라는 길을 닦아놓았고 공자는 사람이 되라는 길을 닦아 놓았다. 터놓은 길은 신비로운 길이 아니다. 두려운 길도 아니며 외지고 후미진 길도 아니다. 나아가 무서운 길은 더욱 아니다.다만 길을 따라 걷기가 힘이 들 뿐이다. 어디 힘들지 않은 길이 있는가? 종교의 길이란 본래 고행의 길이 아닌가? 그러나 힘은 들지만 어려운 길은 아니다. 그저 세 사람의 성인이 닦아 놓은 길을 우리는 걷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태어난 인생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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