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권력욕(權力慾)에 빠져도 몸을 망치고 재물욕심에 젖어도 몸을 망친다. 몸을 망치는 것 자체는 그 사람의 책임이므로 상관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주위에 폐를 끼치게 된다. 인간에 있어서 타인에게 봉사하는 것만큼 즐거운 것은 없다. 누구나 마음속으로는 타인에게 봉사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타인에게 봉사하는 것은 자기의 존재 증명인 것이다. 연인을 위해 일하는 것만큼 인간에게서 즐거운 것은 없다. 그것을 사람들은 갸륵하다든가, 아름답다고 한다. 확실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봉사하는 것을 또 한사람의 연인이 기대하고 있을 때에 한해서 아름다운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는 것, 돌봐주는 것이 때로 자식을 무능하게 만드는 것과 같이 연인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주는 것, 돌봐주는 것이 때로 연인을 못 쓰게 만든다. 돌봐주고 싶다고 하는 자기의 감정에 빠져서 타인은 못쓰게 만들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일은 많다. 이것을 명리학(命理學)에서는 모자멸자(母滋滅子)라고 한다. 돌봐줌으로서 즐거운 것은 자신이다. 결코 상대방이 아니다. 돌봐줌으로서 자신이 즐거워하는 것과 그것을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돌봐주는 것은 자기의 욕구이며 그것과 상대방과는 전혀 별개문제이다. 6.25 전란 후 어린이의 영양을 위해 자기는 보리죽을 먹어가며 아이를 키운 어머니는 참으로 많았다. 아니 대다수의 어머니가 그렇게 아이를 키웠다. 자기는 먹지 못하더라도 아이에게 먹이고 자기는 추워도 아이는 춥지 않게 해 주었다. 그것을 그렇게 하는 편이 편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굶어 죽는 것보다도 아이가 굻어 죽는 것이 훨씬 더 괴로운 것이다. 이것이 소위 모성애(母性愛)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人類)가 존재되어 지는 것이다.

자기가 괴롭다는 것과 타인이 괴롭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어린아이를 가진 어머니는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아이를 위해서 자기는 그 아이와 헤어지는 것이 좋을까? 하는 생각을 갖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는 자식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고 있는 것은 자신뿐인 것이다. 귀엽다는 생각에 감싸여 있을 뿐이다. 내가 아는 여성 한분이 나에게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자식 곁에 있어주고 싶습니다.” 있어주고 싶다는 생각이야말로 어머니의 본질이 아닐까? 어머니는 곁에 있으면서 봉사하고 싶은 것이다. 봉사한다는 것은 모두 좋은 일이라는 그릇된 사고방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옆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싶다.” 가 얼마 후 “곁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해 주고 싶다.” 는 식으로 변한다. 봉사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좋은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니다. 해주는 것은 좋을 때도 있고 나쁜 때도 있다. 그것은 조건에 따라 다르다.

사랑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규정한 것의 배경에는 우리의 마음이 켕기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노력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러니까 이토록 사랑을 찬미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상대를 위해 봉사하고 싶다고 생각한 인간은 그것이 단순한 욕구에 불과하다고 느낄 것이다. 권력욕이나 명예욕, 재물욕과 같은 하나의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낄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동경을 품는다. 그 때문에 사랑의 예찬(禮贊)이 시작된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자식이나 사람에게 헌신이야 말로 자기의 존재증명이며 인간의 가장 뿌리 깊은 욕구이다. 헌신 그 자체는 선(善)이 아니고 욕구이다. 헌신 그 자체는 휴머니즘이 아니고 욕구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