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포럼] 김미혜ㆍ충북대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교수


▲김미혜ㆍ충북대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교수
내가 아는 어느 지인이 다섯 살 된 아이에게 잠자리에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 옛날에 토끼랑 거북이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게 되었었거든..." 한참을 엄마이야기에 빠져있던 녀석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엄마! 왜 토끼와 거북이는 육지에서 경주를 하는 거야? 바다에서 수영시합을 했다면 거북이가 그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동화를 들려주던 엄마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그건 동화제목이 토끼와 거북이라서 그래" 하고는 궁색한 답변으로 얼버무렸다고 한다.

지난 금요일에 머리위에 이미 흰눈이 내려앉은 여자교수님 몇 분을 만나는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날의 주제는 양성평등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고 당신들이 젊었을 때 얼마나 현장에서 피해를 받고 살아왔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끝없이 터져 나왔다. 한참동안 토론에 귀 기울이던 나는 재미있는 현상을 한가지 발견했다. 환갑을 내다보는 그 분들이 열변을 토하시는 모습이 나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아온 내 어머니의 시집살이의 설움을 터뜨리던 모습과 어쩜 그리도 똑 같던지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이미 당신들이 살아왔던 방식과 다르게 만들어진 규칙이나 원칙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을 끼워 맞추기 위한 고통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던가보다. 그러다 보니 설움이나 한스러움이 쌓이고 터져 아무리 시간이 흘러갔어도 그 때의 이야기를 꺼내려 하다보면 감정이 먼저 복받쳐서 가슴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나보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이야기하려해도 차가워진 머리와는 다르게 당신들 가슴 속에는 저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 하나씩 쯤은 가지고 있으니 그도 그럴 것이다.

386세대라 불리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세대이다. 어릴 적 어려운 가정을 도와 집안 식구들 눈치보며 공부하랴 결혼해서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며 낯선 시집살이로 시어른 공양하랴 나이 들어 쉬지도 못한 채 시집간 딸 아이 육아와 며느리 눈치만 보았던 우리네 어머니 세대에 비하면 우리는 다르기 때문이다. 어릴 적 공부를 핑계로 빗자루와 걸레 대신 책가방과 도시락으로 집을 나섰으며 결혼해서 직장을 다닌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시어머니의 헌신적인 육아 희생을 받으며 행복을 누리는 세대가 아니던가.

남성들이 세워 놓은 사회적 규칙 속에서 참고 견디며 자리매김을 하였던 선배 여성 커리어 우먼들이나 서로 다른 가족 관계에서 혈혈단신으로 시집와서는 기나긴 시간의 결과로 새로운 가정의 역사를 만들어 주신 내 어머니 세대들에게 그래서 나는 항상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녀들은 어쩜 동화 속의 거북이보다 더 외롭고 힘든 경주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남성사회나 낯선 체계에 대한 감정 섞인 분노보다는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여유를 부리게 되는 건 아닐까?

이제는 과거를 보상받기 위한 요구보다는 현실에 적합한 경주장이나 규칙을 요구하는 시기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다만 우리도 우리들이 해야만 하는 권리와 의무를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수행을 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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