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기획연재 > 충북의 성씨를 찾아서
(45)충주지씨(忠州池氏)
시조 지경 … 고려때 중국서 건너와
종두법 도입 지석영·독립운동가 지청천 등 인재 배출
과거급제자 100명 … 현재 충청권에 1만7759명 거주
정복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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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1.31  15: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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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지 경(池鏡, 903∼1003)은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960년(고려 광종 11)태학사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태보, 평장사에 이르렀다.

그 뒤 6세손인 지종해(池宗海)가 충주에 살았으며 고려 때 문하시랑평장사로 충주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시조로부터 16세까지 모두 11대 36평장사를 내었다.

고려 말 지용기, 지용수, 지용도 등은 역성혁명의 과정에서 숙청된 이후 가문의 세력이 크게 위축된다.

지석영(1855~1934)은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종두약 제조법을 배우고 돌아와 종두법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지청천(池靑天)은 독립운동을 할 당시 왜군의 경계를 피하기 위하여 어머니의 성인 이씨(李氏)로 바꾸고 이름도 본래 석규(錫奎) 혹은 대형(大亨)에서 청천(靑天)이라고 바꾸었다. 지청천의 딸 지복영(池復榮)도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현대 인물은 지태순(익성학원 설립자), 지정도(국회의원), 지갑종(국회의원), 지연태(국회의원), 지학순(천주교원주교구장), 지달현(국립보건원장), 지설하(국립종축장장), 지성구(대사), 지창수(국세청차장), 지경환(육군소장), 지헌택(대한치과의사협회장), 지영춘(수협중앙회장), 지영인(농학박사, 충남대총장), 지윤(이화여대교수), 지영대(공학박사, 한양대교수), 지창하(체신부감리국장), 지헌정(충북도기획관리실장), 지홍원(부장판사), 지창권(부장판사), 지명철(검사), 지치영(총무처인사국장), 지주선(안전기획부국장), 지영만(건설부도로국장), 지문식(변호사), 지익표(변호사), 지정일(법학박사, 서울대교수), 지낙균(내무부감사관), 지원상(루터교총회장), 지명열(문학박사, 서울대교수), 지순택(도예가), 지갑섭(제일은행상무), 지철근(공학박사, 서울대교수), 지원해(신학박사), 지창용(지사(地師), 역술가, 한국역리학회장), 지의택(치안본부감사담당관), 지철근(한일어업회담수석대표), 지계순(홍익대교수), 지중윤(이화여대교수), 지명관(덕성여대교수), 지용하(서강대교수), 지창열(이학박사, 서울대교수), 지춘상(조선대교수), 지중민(경희대의대병원장), 지세현(대한화재보험 부사장), 지규억(삼성중공업 부사장), 지태현(순창한의원장), 지해수(남대구경찰서장), 지용택(전국자동차노조위원장), 지성양(신흥증권대표), 지장수(성진산업대표), 지승동(대명종합건설대표), 지호대(동화해운대표), 지권영(봉래물산대표), 지창선(교육사업가), 지종호(흥농비료대표), 지영학(동양철관전무), 지윤찬(청수주택회장), 지홍창(박정희대통령주치의), 지응업(공학박사, 아주대교수), 지청(경제학박사, 고려대교수), 지승룡(신흥증권 대표) 씨 등이다. (무순위, 전·현직 구분 안 됨)

항렬자는 36世 재(載) 대(大), 37世 현(鉉) 호(鎬), 38世 구(求) 영(永), 39世 근(根) 식(植), 40世 환(煥) 묵(默), 41世 배(培) 철(喆), 42世 선(善), 43世 태(泰), 44世 수(秀), 45世 열(烈), 46世 균(均)이다.주요파는 참의공파, 충성군파, 경력공파, 소윤공파, 현령공파, 익안군파, 감역공파, 군사공파, 태학사공파, 주서공파, 찬성공파, 상원수공파, 절제공파, 군사공파, 감찰공파 등이다.

집성촌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충북 괴산군 불정면 창산리, 충남 부여군 초촌면 초평리, 전남 여수시 율촌면 가장리,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군업리, 충남 아산시 인주면 금성리, 전북 부안군 동진면 본덕리, 전남 완도군 청산면 청계리, 충북 청원군 남일면 은행리 등이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100명이 있다. 문과 10명, 무과 39명, 사마시 31명, 역과 1명, 음양과 14명, 율과 5명이다.

인구는 2000년 현재 11만8211명이다. 서울 2만5715명, 부산 6824명, 대구 4087명, 인천 7125명, 광주 2182명, 대전 3667명, 울산 2409명, 경기 2만7417명, 강원 6156명, 충북 7847명, 충남 6245명, 전북 2582명, 전남 3599명, 경북 6184명, 경남 5237명, 제주 935명이다. 충북과 충남에 많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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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복
충주지씨 유래

지씨(池氏)는 조선씨족통보」 에는 지씨의 본관을 89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충주, 울진, 경주, 청주, 단양, 광주 6본으로 전한다. 그들은 아직 정확한 문헌이 없기 때문에 고증하기가 어렵다

황명만성통보(皇明萬姓統譜)와 운부군옥(韻府群玉)에 『지씨(池氏)는 서하(西河:중국의 지명) 땅에서 나서 그 산 곳(居住地)의 이름으로 성(姓)을 삼으니 치음(徵音:五音의 하나)에 속(屬)한다』하였고 또 성씨비고(姓氏備考:책이름)에는「서하(西河)는 경치 좋은 곳으로 계속하여 물이 맑게 흐르는데 진(秦)과 송(宋)나라에서 으뜸인 고장으로 지자화(池子華)는 지(秦)나라 승상(丞相)이었고, 지몽리(池夢鯉)는 송(宋)나라 함순(咸淳:南宋-1265~1574)년간에 특별과거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으며, 한(漢)나라 지원(池瑗)은 중모령(中牟令)으로 어진이(賢人)로 이름이 낫고, 송(宋)나라 지광정(池光庭)은 진사(進士)로 문학(文學:글과 학문)으로써 이름을 떨쳤는바 모두 『장계(長溪) 사람이다』하였다.

【시조】시조 선의공 지경(池鏡, 903~1003, 시호는 선의, 자는 자운, 호는 암곡)은 중국 송나라 중원 홍농 사람으로 960년(고려 광종 11년)에 귀화했다. 당시 태학사(8성씨[곽씨,])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태보, 평장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주를 본관으로 정하게 된 것은 시조할아버지의 5세손 되는 지종해(池宗海)께서 고려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란 높은 벼슬을 지내시고 식읍(공이 많은 신하에게 어느 고을을 맡겨 군(君)으로 봉하였기로 이로부터 충주가 본관(本貫)이 된 것이다.
시조 지경의 묘는 평안도 중화 당악산 화산정에 있다.

【주요파】충주지씨의 세계는 크게 8파로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30여 파로 분파된다.

▲충의군파(忠義君派, 파시조 17세조 지용기)▲ 판관공파(判官公派,파시조 15세조 지윤) ▲주서공파(注書公派, 파시조 15세조 지정) ▲태학사공파(太學士公派, 파시조 17세조 지용하) ▲판형공파(判形公派. 파시조 17세조 지천봉)▲주서명천공파(注書明川公派, 파시조 17세조 지을현)▲봉사영흥공파(奉事靈興公派, 파시조 17세조 지을생) ▲낭장공파(左營公派, 파시조 12세조 지일삼)


시조 지경은 중국 송나라 사람이다. 고려 광종 때 사신으로 왔다가 고려에 귀화했다. 그의 5세손 지종해가 평장사를 역임하고 충원백에 봉해진 이후 본관을 충주로 했다. 한편 지중익의 후손은 ▲충주어씨(忠州魚氏)로 갈려 나간다.

충주지씨는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16세까지 모두 11대 36평장사를 내었다.

그중 충의군파(忠義君派)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으며, 전체인구가 특히 충의군파(忠義君派)가 전체 충주지씨의 80%를 차지한다. 고려에 36명이 정승에 버금가는 평자사의 고위직을 역임했다. 조선에 문과급제자 12명, 진사 75명과 많은 무장을 배출하였다.
고려말 지씨 세력의 대표적 인물인 지용기, 지윤 등이 역성혁명의 과정에서 숙청된 이후 가문의 세력이 크게 위축된다.

조선조말과 일제하의 민족항쟁기의 인물로 이름이 높은 이는 지석영과 지청천이 있다.

지석영은 박영선에게서 "종두귀감"을 얻어보고 느낀바 있어 1879년 부산의 일본 병원 제생의원에 가서 종두법을 배웠다. 다음해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종두약 제조법을 배우고 돌아와 종두법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1883년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참의, 동래부사를 지낸 다음 1899년부터 10년간 경성의학교 교장으로 있었다. 그는 국문연구에도 공헌하였다. 1905년에는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왕에게 상소하여 공포케 하고 학부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케 하였다. "우두신설(牛痘新說)" "자전석요(字典釋要)"가 전한다.

지청천은 본명이 지대형이고 일명 이청천(李靑天)이라고도 한다. 구한말 정부파견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망국 후 졸업, 일군 소위가 된다. 1919년 3.1운동 직후 일본을 탈출하여 3.1운동에 참여하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敎成隊長)을 지냈다. 그 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군대를 이끌고 대한독립군단에 편입, 여단장이 되었다. 1921년 흑하사변이 일어나자 한때 적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1940년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중국군과 협력하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1천여년 동안 47세의 大宗을 이루고 있다

(2013-11-17 18: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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