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은 장난을 하면서 자란다. 꽃병을 가지고 장난하다가 깨뜨릴 수도 있고 새로 도배를 한 벽에 낙서를 할 수도 있으며 형제끼리 싸움을 할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잘못이 있음으로서 그들은 자랄 수 있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를 일이다. 요컨대 부모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잘못된 행동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한 두번의 잘못이 있었다고 어린이의 인격자체를 모독하거나 비웃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점 우리는 유태의 가정에서 배워야 할 일인 것 같다. 어린이의 인격이 아니라 잘못된 구체적 행동을 꾸짖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어린이를 꾸짖을 때에 지켜야 할 몇 가지의 수칙이 있다. 한 가지는 노(怒)한 상태에서 꾸짖거나 나무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모두 참으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유태의 격언 중에 “노(怒)해 있을 때 가르칠 수는 없다.”는 말은 이 점을 적절히 말해주고 있다. 결국 성을 낼 수도 있지만 노한 상태를 가라앉힌 다음 차분하게 잘못된 행동을 지적해 주고 그것이 좋지 못한 결과를 수반하게 된다는 것을 일러주는 일이 중요하다. 또 한 가지는 잘못된 행동을 즉각적으로 시정해주는 일이다.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정도라면 시간적 여유를 주어서 혼자 반성해보고 침착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 이하의 어린이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그 자리에서 주의를 주거나 꾸짖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방법은 밖으로 나타난 행동만을 보지 말고 그런 잘못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살피는 일이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순전히 우발적으로 일어난 행동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좌절된 감정 때문에 그런 행동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경우 좌절된 감정을 충족시켜주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부모로서의 길은 어렵고도 끈질긴 인내를 요구하는 길이다. 이 길은 어두운 밤에 등불 없이 갈 수 있는 평탄한 길이 아니다.

유태인의 교육을 살펴보기 시작하면서부터 계속해서 마음 한구석에 있었던 의문의 하나는 엄격한 규제와 현실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운 생활규범 속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하는 비결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실상 그들의 생활은 율법(律法)에 얽매여 있는 여러 면에서 제약된 생활임에 틀림없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이나 어린이의 처지에서 본다면 현실생활에 대한 적응이 대단히 어려울 것만은 사실이다.

미국 뉴욕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 학급에서 근교에 있는 녹지대로 소풍을 간 일이 있다. 그 학급에는 유태인 학생 세 명이 끼어 있었다. 현장에 도착한 어린이들은 모두 즐겁게 뛰어놀고 가게에서 먹을 것들을 사먹는다. 그때 TV를 통해서 한참 선전하던 과자가 있었는데 TV의 선전 탓인지 어린이들은 모두 그 과자들만을 사서 먹었다. 이때 유태인 학생 한 명이 여러 어린이들 틈에 끼어서 그 과자를 사려고 하자 다른 유태인 학생이 황급히 달려가서 넌지시 귀띔을 하는 것이었다. “데이빗! 우리엄마가 그러는데 그 과자는 돼지기름으로 튀긴 것이라 먹으면 안 된대.” 그 말을 들은 유태인 어린이는 거의 반사적으로 과자를 사려던 대열에서 물러섰다. 이 이야기는 유태인으로서의 생활이 얼마나 제약받고 있는가를 잘 나타내준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런 환경에서 자라나는 유태의 어린이들이 정서적(情緖的)으로 잘 안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미국에서 발표된 연구보고에 의하면 이른바 정서적장애아(情緖的障碍兒)를 종목별로 분류해본 결과 가장 비율이 낮은 민족은 유태인이고 그 다음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런 결과를 낳게 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결국 얻을 수 있는 명확한 결론은 건전한 가정이 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세밀하게 유태의 가정을 관찰해 보면 그 가정 속에는 어린이들의 정신적 지주(精神的支柱)가 있고 또 그들의 생활을 보다 풍성하게 해주는 즐거움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즐거움이란 어린이로 하여금 어릴 때에 마음껏 놀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흔히 어릴 때 놀면 어른이 되어서도 놀게 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유태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어릴 때에는 충분히 놀리고 서서히 학교 공부의 길로 유도한다. 그들은 학교 공부를 결코 어린이에게 타율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어린이가 자진해서 공부에 열중하도록 유도하며 공부란 즐거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도록 하는 것에서부터 서서히 보다 깊은 탐구의 길로 인도한다. 공부를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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