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 둘레길을 꿈처럼 바람처럼 걸었다. 호수가 있었기에 태어난 길, 수몰된 지 33년 만에 선보이는 500리길을 걷는데 1년이 걸렸다.

대청호 둘레길은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꿈꾸어 오던 길이었다. 물 따라 산 따라 걷는 동안, 호수는 내가 기대한 만큼 계절마다 구간마다 수려한 모습으로 선보였다. 아직 사람 발길이 드물어 물음 물음하여 길을 찾고, 속살을 더듬으며 얻은 길이었기에 둘레길에 대한 애착과 감동의 여운이 생생하다.

대청호의 얼굴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하지만 원래 모습은 고요를 담아내는 호반의 안정감이 아닐까. 해발 80미터 아래 4000여 세대의 삶을 모조리 수장(水葬)하고도 격랑의 세월을 모르는 척, 태연한 척, 늘 그 자리를 무던하게 지키고 있다. 다만, 허리 굽은 실향민의 시름과 간간이 세워둔 망향비만 지나간 영욕의 세월과 현재를 연결해 주고 있다.

누런 황사바람에 봄맞이꽃이 바르르 떨던 날, 버석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4만 년 전에 어린 나이로 숨진 '홍수아이'의 동굴을 지날 때는 찔레꽃 향기가 코를 찔렀고, 묘암리 고개 너머 벌랏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논에 물이 들고 뻐꾸기가 울었다.

한여름의 더위를 식히던 은운리 계곡과 막지리를 지나가는 산에서 서서히 내려오는 단풍을 만났고, 시인이 전해주는 감수성을 빌어 향수길을 걸었다.

계절이 바뀌고 은행잎이 떨어질 때는 청풍정에 도착했다. 물위에 떠 있는 듯 고즈넉한 청풍정 물결 위에 삼일천하 갑신정변의 덧없는 권력을 보았고, 갈잎의 속삭임은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천 풍경에 빛나는 부소담악을 지나면 둘레길은 종반으로 치닫는다. 눈발이 날리던 날 걷던 고리산(환산) 구간은 피비린내 나는 나제(羅濟) 병사들의 전쟁터였다. 시체가 쌓여 백골(白骨)이 널렸다는 백골산성, 병사들이 흘린 피가 내를 이루었다는 핏골까지 전쟁과 핍박으로 점철된 한민족의 한과 애환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간이다.

농촌의 삶이 아직 팍팍하다고는 하나 대청호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에게는 향기가 있다. 풍족한 물을 중심으로 때가되면 꽃피고 열매 맺는 섭리대로 넉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그러나 풍경 따라 가는 길에 사람들의 흔적은 뜸하기만 하다. 물어 볼 이 없어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였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필요로 하지만, 두메산골에서 때 묻지 않은 여정만큼은 행복하다.

이제 대청호 둘레길 열여섯 구간 중에 마지막 한 구간만 남겨 두었다. 지나 온 길을 되돌아보니 먼 여행을 마치고 귀향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이대로 마침표를 찍기에는 한편 허전함이 밀려온다.

이런 마음의 치유를 받고자 둘레길에서 비켜난 새로운 여정을 미리 짜 본다. 먼 길도 아니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우리의 일상과 함께 하기에 대청호의 이웃을 찾아많은 사람들이 함께 떠났으면 좋겠다.



/박재명 충북도 동물방역팀장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