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타인을 위해서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범하는 잘못은 바로 이것이다. 자식이 귀여우니까 귀여워하고 싶어서 귀여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식이 성장해서 부모의 곁을 떠나갈 때 웃음으로 보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자기는 먹지 못하더라도 자식에게 먹이고 싶어서 먹인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니까 그렇게 했을 뿐이다.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는 굶주림을 참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서,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젊은이를 위해서∙∙∙∙ 이런 것들은 모두 상대방에게 해가될 뿐이다. 인간은 답례를 받을 조건이 부여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하고 싶어서 한 것이다. 당신에게서 답례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라는 마음이 언제나 있음으로서만이 인간관계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이 없는 인간관계는 때가 오면 이윽고 파괴되고 만다. “당신을 위해서 고생했다.”가 아니라 “당신이 좋아서 고생했다.”고 함으로서 만이 두 사람의 관계는 지속된다.

그런 사랑을 성취할 때 뭔가 어쩔 수 없이 괴로운 일이 있어도 아무래도 “그이를 위해서 이것을 참자.”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있다면 그 괴로움을 피하는 것이 좋다. 마음속에서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좋으니까∙∙∙∙ 라고 생각하게 됐을 때에 그 괴로움에 도전해야 한다. 혹은 자기를 위해서 라고 생각하는 괴로움으로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그 이상의 고생을 하면 그것은 사랑의 파탄을 초래할 뿐이다. 인간이 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타인에게 은혜를 입히는 것이다. “해주었다.”는 마음가짐이 있는 한 잘 되어갈 리가 없을 것이다. 부모나 자식관계가 순탄하지 못한 것도 이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내가 젊었을 때는 먹을 것도 없었다. 날씨가 춥더라도 제대로 입을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의 너희들은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있다. 그래도 불평을 할 수 있느냐”

먹여 주었다∙∙∙∙ 는 마음이 부모에게 있다면 결코 순탄할 수는 없다. 확실히 지금의 부모가 젊었을 시대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젊은 사람은 풍부한 시대에 태어났다. 그런 것들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해주었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순탄하지 못할 것이다. 연애도중 남자가 도망갈 때도 그렇다. 여성 측에게 나는 당신에게 “주었다.”는 마음가짐이 있으면 남자는 결국 참을 수 없게 되어 도망가고 만다. 여성도 “준”이상 남성에게 그런데로의 요구는 한다. “주었다.”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잘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내가 원했기 때문에 된 것이다 라고 생각함으로서 비로소 두 사람의 관계는 원만해진다. 부모는 자식에게 “호강을 시켜주고 있다.”가 아니고 “내가 호강하고 싶어서 호강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생각하면 원만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무리를 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파탄이 온다. “내가 원했습니다.”하고 너그럽게 생각할 정도 이상의 것을 한다면 언젠가는 보답이 있다. 무리를 해서 해주면 해가 거듭될수록 파문이 생긴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상대방의 말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나는 당신이 사랑해준다고 해서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한 때 그 남자와는 결혼하려고 진정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 결혼하려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이 이러이러한 것을 해 달라고 하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것을 했다고 하는 것은 상거래나 정치적 행위에는 중요하나 그렇지 않은 인간관계에는 금물이다. “상대방이 이렇게 했으니까”가 아니고 “비록 말하지 않아도 나는 이렇게 했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행동에 있어서는 내면적인 것도 중요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외부에 나타나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일단 누구라도 만족한다. 그러나 연애라든가 부모와 자식간이라든가 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외적 행동이 있어도 내면이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여행에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이미 갈 마음이 없어졌는데 억지로 여행을 해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상거래의 경우는 상대방이 마지못해 억지로 하더라도 의미는 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은 재미있고 수월하다. 그러나 남이 시켜 하는 일은 싫다. 내가 들고 싶어 드는 돌은 가벼우나 남이 시켜 드는 돌은 무거운 것이다. “남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라야 한다. 그래야 행복하고 편해지니까.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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