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 1.68㎞·최고 높이 13…사적 235호 지정
서문입구 바위 위 김생 필체 '아미지' 등 유명
대야리 고분군 중심 '역사테마파크' 건설 추진

[충청일보 조무주 대기자] 최근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유명 관광지는 물론 문화재, 천연기념물 등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충청도에 문화재가 많으며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은 관광지도 있다. 충청도 뿐 아니라 전국적인 명소와 문화재 등을 찾아보기 위해 '발따라 길따라'를 시작한다. 가능하면 충북의 문화단체와 함께 명소를 찾아다니며 문화재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여행은 즐겁다. 특히 반가운 사람들과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여행이라면 더욱 의미있고 행복한 일이 될것이다. 충북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산울림 시낭송회(회장 박태언)' 회원들이 보은의 삼년산성에서 시(詩) 낭송을 한다는 연락이 왔다. 성에서의 시 낭송, 어쩐지 환상적인 무대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삼년에 걸쳐 쌓은 성(成), 삼년산성. 왜 하필 삼년이었을까. 우리 민족은 삼(三 )을 좋아했다. 내기를 할때도 삼세번이고 아기를 점지 해주는 신을 삼신(三神)이라 불렀다. 고을의 수령은 3년에 한번씩 교체됐으며 신(神)에게 절을 할때 세번한다. 특히 삼세번은 공정한 평가를 위해 세번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어서 배려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 삼년산성 중에 비교적 터가 잘 남아 있는 남문지.© 편집부
3년간 공사 끝에 완성됐다 하여 삼년산성이다. 전국의 많은 석성(石成) 중에 이처럼 정교하게 쌓여진 성이 없다고 한다. 크지 않은 돌을 모아 정성으로 쌓은 흔적이 뚜렷하다. 그래서 아직도 성의 윤곽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물론 여기저기 무너진 곳이 있지만 삼국시대 쌓여진 성 치고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1.68㎞, 가장 높은 곳이 13m다. 큰 성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규모다. 그러나 군사 요충지로 이곳에서 삼국간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사적 235호로 지정된 것을 보아도 이 성이 얼마나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삼년산성은 오정산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조성됐다. 최고 높이는 326m. 높지는 않지만 성곽에 올라서면 사방이 다 보인다.그래서 군사 요충지라 불렀을 것이다.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곳도 이 성이다. 삼국통일시 태종 무열왕은 당나라 사신 왕문도를 이곳에서 맞이했을 정도다.

산울림 시낭송회 회원들과 삼년산성을 찾았을때는 파릇하게 새싹이 돋는 이른 봄이었다. 성 일대는 진달래가 유난히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최근에는 진달래가 많이 사라졌다. 복원공사를 하느라 훼손했기 때문일 것이다. 봄 햇살이 성벽에 부딪치며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산새들은 저마다 나뭇가지에 앉아 오후의 한때를 노래하고 있다.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우리 일행은 천천히 성을 걷기 시작했다. 산책하기 안성맞춤의 길이다. 가파르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길, 시 보다 감동있는 역사의 현장을 보며 우리는 모두 행복했다.

성문터는 동서남북 4곳에 있다. 서문터에는 너비 165㎝의 홈이 있어 큰 수레가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수구는 서쪽 성문 옆 계곡에 있으며, 우물터는 5개소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중 아미지(蛾眉池)가 가장 유명하다. 서문 입구에 자리잡고 있으며 바위에 새겨진 '아미지' 글씨도 선명하다. 아미지와 함께 옥필, 유사암이라는 글씨가 음각돼 있는데 김생의 필체로 알려지고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김생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서도에 정진 예서·초서·행서에 능했다고 한다. 고려 사신 홍관(洪灌)이 송나라에 가서 한림대조(翰林待詔)인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에게 김생 글씨를 내보이자 '왕희지(王羲之)에 비길 만한 명필'이라고 극찬했다고 전해진다.
▲ 봄 햇살이 부딪치는 삼년산성. 충북 보은군에 있는 이 성은 삼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됐다고 하여 붙여졌다. © 편집부
김생은 후에 충주 북진(北津)에 있는 절에서 중이 되었다. 중이 된후 삼년산성에 와서 아미지, 유사암, 옥필 등의 글씨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오정산의 본래 주인은 백제다. 후에 신라 손에 넘어갔으며 신라와 백제는 이 삼년산성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삼국시대 이후 고려, 조선 시대에도 이 성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조선시대 토기 등이 많이 발견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최근 삼년산성 앞 대야리 일대에 1600기의 고분군이 확인됐다. 이 고분군을 중심으로 보은군은 '역사테마파크'로 건설할 예정이다. 현재 학술조사와 고분복원 사업을 시행하고 있으며 역사테마파크가 완공되면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충북의 명소가 될것이다.

우리 일행이 성을 내려올 쯤 붉은 물감을 뿌려 놓은듯 저녁노을이 불타고 있었다. 성이 건설된후 수백년간 이곳에는 이처럼 붉은 노을이 물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군사들은 전쟁의 참화속에서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고향에 두고온 부모 형제를 그리워 했을 것이다. 일정상 산성에서 시 낭송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주 의미있는 여행이 되었다.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 되면 또 와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우리 일행은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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