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편> 내포 동학의 초기 유입지…전설적 관작리 전투

▲예산관작 전투지를 가리키는 박성욱씨. 그는 향토사학자로 관작전투지 상황을 낱낱이 꿰고 있었다

예산지역은 &amp;amp;amp;amp;lt;천도교회사-초고(草稿)&amp;amp;amp;amp;gt;에 포덕 24년 계미(癸未&amp;amp;amp;amp;middot;1883년) 2월조에 &amp;amp;amp;amp;quot;&amp;amp;amp;amp;hellip;박인호, 안교선, 안익명, 윤상호&amp;amp;amp;amp;hellip;등이 차례로 신사(최시형)께 배알하였다&amp;amp;amp;amp;quot;는 기록이 보이며, &amp;amp;amp;amp;quot;내포와 공주 지역 지도자들이 단양 남면 갈래골에 있는 최시형을 찾아 왔다&amp;amp;amp;amp;quot;고 하였다. 이는 일찍이 내포 일대에 상당수의 동학 도인들의 왕성한 활동을 의미한다.

『홍양기사(洪陽紀事)』의 자료에서 이 지역의 동학교도의 구체적인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우선 &amp;amp;amp;amp;quot;홍주에서는 이미 4월부터 동학교도의 소요가 있었고, 7월이 되면서 충청도 전역에 걸쳐 동학교도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amp;amp;amp;amp;quot;또 &amp;amp;amp;amp;quot;덕산 예산 대흥 보령 남포 면천 등에 선무사의 효유 대상인 동학 거괴가 존재했다&amp;amp;amp;amp;quot;는 기록으로 보아 동학교도의 활동이 훨씬 이전부터 두드러졌다.

▲농민군 집결지 예산군 신례원 전경

9월 교단의 무력봉기 선언이 있기 전부터 박인호가 이끄는 예산 지역을 중심으로 내포지역이 사실상 기포 단계에 들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삽교 하포리 박인호 대접주의 집 위쪽 목시(현재 삽교 성리1)는 당시 장이 크게 섰던 곳으로, 일찍부터 내포의 동학혁명군이 기포하여 주둔하고 있었다.

이 상황은 동학혁명군 진압 기록으로 만날 수 있는데, &amp;amp;amp;amp;quot;동비(東匪) 공격에 나선 것은 10월 8일이었다. 이들은 수영에서 군기를 탈취한 동비를 뒤쫓아 광천으로 진출, 광천시장에서 전투를 벌여 동비 수 십 명을 죽이고 9명을 체포했다.

이어 11일에는 중군 김병돈이 각 진에서 뽑은 용장 500명을 거느리고 목시로 출군하여 동비를 격파하고 군기와 말을 거두어 왔다&amp;amp;amp;amp;quot;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 인하여 목시에 둔취했던 예산 지역 동학교도의 핵심 근거지가 큰 타격을 입었고, 유회군에게는 동비를 토벌할 절호의 기회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주한 왜공사관 기록에도 &amp;amp;amp;amp;quot;7&amp;amp;amp;amp;middot;8월쯤에 벌써 내포의 어민 농민에 의해 해상이 봉쇄됐다&amp;amp;amp;amp;quot;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관군과 일본군은 토벌 초기부터 내포동학군이 공주전투 합류를 차단할 작전으로 대응한다. 내포는 예산 홍주 서산 태안을 중심으로 막강한 동학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인호 유허비

지난 10여 년 전 답사 때 전설 같은 흥미 있는 관작전투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amp;amp;amp;amp;quot;홍주목사 이승우가 이끄는 관군이 예산 목소리에 있는 대도소를 치고 나서 오만방자하여 용골에 진을 치고 밤에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는데, 주막 할멈이 대포에 물을 붓고 이를 동학군에 알려서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amp;amp;amp;amp;quot;는 것이다.

이는 단지 당시의 민심을 전하는 대목이라고 흘려들었는데, 이번 답사에서 이 지역 향토 사학자 박성묵 씨는 &amp;amp;amp;amp;quot;박인호를 동학 도인으로 인도한 주막 할멈 월화노인이 실제 인물&amp;amp;amp;amp;quot;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전하는 기록은 다르다. 당진 면천 승전목 싸움에서 승리한 동학혁명군은 기세당당하게 고덕 구만포까지 진출하였고, 유숙한 다음날인 25일 저녁에 신례원 뒤뜰(後坪)인 관작리 일대에 유진했다.

&amp;amp;amp;amp;lt;천도교회사 초고&amp;amp;amp;amp;gt; 기록에 그 위세를 &amp;amp;amp;amp;quot;약 3km에 걸쳐 볏짚을 이용한 초막이 세워졌으며, 동학군 수효가 약 5만&amp;amp;amp;amp;quot;이라 했다. 한편, 홍주성에서 출발한 1천 명의 관 일본군은 미리 약속한 예산 대흥 지역에서 모집한 유회군과 합류하여 4~5000 명의 대 군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26일 아침부터 관 일본군은 신례원 앞 얼음재 상봉에다 대포를 설치하고 사격을 개시했다.

이에 놀란 동학혁명군이 흩어졌다 다시 모여 드는 등 한나절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먼저 예산 유회군이 붕괴되었고, 이에 놀란 관 일본이 달아나 동학혁명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두황의 &amp;amp;amp;amp;lt;양호 선봉일지&amp;amp;amp;amp;gt;에도 당시 &amp;amp;amp;amp;quot;&amp;amp;amp;amp;hellip;홍주 관군과 접전하여 관군이 참패하여 1백여 명이 전사하고 동학군은 해미로 떠났다고 한다. &amp;amp;amp;amp;hellip;천변에 홍주 사람들이 몰려와 시체를 찾느라 아우성인데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었다&amp;amp;amp;amp;quot;고 하여 당시 참상을 보여주고 있다.

내포 동학혁명군의 최대 승전으로 평가되는 관작리 전투에서 관군 중군대장 김병돈, 영관 이창욱, 주홍섭&amp;amp;amp;amp;middot;창섭 형제, 한량 한기경, 예산유생 홍경후 등 30여 명의 지도자가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예산 지역이 동학혁명군에 점령되었고, 유회군을 모집하여 내보낸 대흥과 예산의 수령은 홍주성으로 급히 도피하였다.

동학의 거두 박인호는 누구?

내포 동학혁명사의 한 가운데에는 천도교 4대 교주 박인호가 자리한다. 박인호는 29세 때 예산읍 오리 장터 주막에서 동학에 관한 소문을 듣고 동학이 시대 민중을 이끌 진정한 교리임을 깨닫고 1882년에 동학에 입도한다.

1882년 광화문복합 상소 소수(疏首) 자리에 사촌동생 박광호를 내세우고, 이듬해에는 보은 장내리 집회에서는 덕의(德義) 대접주가 되어 내포 동학의 조직 기틀을 마련한다.

박인호는 덕산 하포리를 중심으로 육임제의 접 조직 방식으로 포덕에 힘써 덕포(德包)라는 전국에서 가장 큰 교단조직을 갖추게 되었으며, 내포는 물론 경기 지역인 진위 죽산 연천까지 영역을 넓혔다.
9월말 박인호는 덕산포 동학군을 데리고 아산 포구를 떠나 태안 방갈리 가시내에 상륙하여 태안 옥에 갇힌 동학도인 30여명을 구출하는 한편 내포 동학혁명군 6만여 명을 이끌고 여미평전투와 관작전투 홍주성전투를 차례로 치러낸다.

일제치하에서도 박인호는 3&amp;amp;amp;amp;middot;1운동과 6&amp;amp;amp;amp;middot;10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갑오년 이후의 동학 포덕과 재조직은 물론 이상옥(이용구) 최린 같은 친일파와 맞서 투쟁하는 파란만장한 형극의 길을 걷게 되며, 1838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패망을 기원하는 멸왜기도(滅倭祈禱)를 주도한다. 3백60명이 투옥되고 4명이 타살 당하는 형극 속에 형사들이 들이닥치자 85세의 노구(老軀) 박인호는 기진한 채 쓰러져 생을 마감한다.


채길순 소설가 &amp;amp;amp;amp;middot;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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