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시간, 옥상 벤치 위에 누가 두고 간 담배갑을 발견하고 마음이 흔들렸다. 하나만 몰래 피울까 하는 유혹이 어찌나 간절한지, 순간 금연 중임을 잊고 일을 그르칠 뻔했다. 제대로 된 금연은 벌써 세 번째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하는데, 이번만큼은 지나간 금연실패를 두고 어떤 이유도 의미 없는 핑계에 불과함을 자인한다. 지금껏 살아 온 날의 절반 이상을 담배와 함께 했지만 딱히 얻은 것은 없었다. 굳이 얻었다면 흡연자끼리 친목을 더하거나 무료한 시간을 달래주는 정도였다. 그러나 흡연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사이가 나빠지고 호흡기능이 떨어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완전한 금연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10여 년 전부터 해왔다. 그러나 하루만 더, 한 개비만 더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기도 하고 극심한 금단증상에 스스로 합리화하는 예외를 정해 번번이 무릎을 꿇어야 했다. 최근에야 금연을 결심하고 수 십 일간 지속하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해 매일매일 최면을 걸고 처절한 금연일기를 쓰면서 마음을 다잡은 효과일까? 이제 겨우 흡연욕구와 유혹을 조금 달랠 정도의 내공을 쌓고 있다. 금연자의 입장에서 되돌아보니 흡연은 정말 무의미했다. 사회적으로 많은 세금을 내면서도 대우를 받기는커녕 비난의 대상이었다. 유전적으로 보자면 흡연을 자식에게 대물림했다. 성장기 아이들이 부모의 흡연을 보며 따라 배웠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보자면 평소에 화기(火氣)를 빨아들이고 살았기에 스스로 화(火)를 끌어들여 참을성이 떨어졌고 행동이 과격했다. 연기를 내뿜는 행동의 긴 한숨은 잠깐의 휴식이 아니라 잠재된 근심과 서러움을 토로하는 한숨과 같아서 측은해 보인다. 그간 흡연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하는 것은 담배에 대한 맹목적인 오해가 아니었을까 싶다. 세상에 가장 무서운 적은 자신이라고 했다. 금연은 궁극적으로 중독성에 대한 자신과의 싸움이다. 자신과의 싸움이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이기고 나면 얻는 것이 많다. 금연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보니 우선 자신감을 되찾은 듯싶다. 금연을 못하던 패배의식이 도전정신으로 바뀌었다. 불같던 성격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심리적인 안정으로 찾아가는 듯하다.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금연 후의 마음과 신체는 분명 긍정적으로 변화되고 있어 반갑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담배를 권하는 시절도, 흡연이 자유롭던 시절도 끝났다. 이제는 법으로 정하는 금연정책을 원망해야 하는 세상이 됐다. 담배를 피우는 것이 이래저래 더 많은 스트레스를 얻게 되는 세상이다. 흡연을 하고도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에게 금연 결심을 권하고 싶다. 우리의 몸은 마음이 정하는 대로 움직인다. 금연 성공의 여부를 따지기 전에 우선 금연 결심부터 해보자. 비록 실패할 수 있겠지만 포기하지 않는 결심이 있는 한, 언젠가 담배에게 안녕이라며 작별할 날이 올 것으로 확신한다.



/박재명 충북도 동물방역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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