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육신의 근원이 되는 물과 정신의 근우원이 되는 영(靈)과 마음의 근원이 되는 혼(魂)의 활동으로 생리적 기능뿐만 아니라 정신적 활동과 이치에 따르는 생명체로써 시(時), 공간(空間)적인 현상계를 초월하고 차원의 한계성을 두지 않으면서 광대하고 신비로운 활동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육신과 정신과 마음이 조화로운 상태에서 우주계의 이치와 더불어 건전한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운명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활동을 하는 기운이 이치의 세계에서 머물고 있는 상황을 우리는 운성(運性)이라고 말을 하기 때문에 운성은 운명을 바치고 있는 받침대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운명은 현상계에서의 작용과 기능과 활동이라고 한다면 운성(運性)은 우주계에서 작용을 하고 존재하면서 운명(運命)을 돕는 조력자(助力者)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운명의 결정론이냐 아니면 스스로가 개척을 하여야 하느냐의 개척론을 논하기보다도 주어진 생명에서 얼마나 행복할 것이며 만족할 것이냐의 문제가 먼저 대두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때에 조금 더 행복하고 성숙한 삶을 영위하며 끝없는 우주계(宇宙界)에서 영혼(靈魂)의 순수함을 유지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정으로 자신의 운성에서 그 순수함을 유지하고 이렇게 주어진 운명이 다른 세계로 넘어갈 때에는 우주계의 일원으로써 그 사명을 어떻게 행(行)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 자신의 법도(法度)를 세우는 것이다. 여기에서 운명의 토대가 되고 이치가 되며 법도가 되는 운성(運性)을 이야기 할 수 있다.


물이야 보이니 마신다고 하더라도 허공중의 공기는 보이지도 아니하고 들리지도 아니하건만 촌각을 다투고 마셔야 한다는 것은 어이 된 까닭일까? 만물이야 욕심으로 보이니 찾는다고 하더라도 허공도 아니요 만물도 아닌 이치(理致)는 보이지도 아니하건만 무엇 때문에 찾아야만 하는 걸까? 사람의 몸이 있다고 하더라도 만물가운데에서 하나요, 몸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치 가운데에서 하나이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아홉 구멍을 허공에다가 의지하지 않고서는 촌각도 지탱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몸이 대지를 의지하였다 하더라도 대지를 의지하여 지탱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허공을 의지하여 지탱하고 있는 것일까?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도 왔었던 것들이 머물고 갔었던 것들이 다시 와서 머물건만 어느 것 하나라도 허공(虛空)과 이치(理致)가 아닌 곳에서 머물고 있겠는가?


모름지기 만물은 공(空)은 다시 허(虛)를 의지하며 허는 다시 무(無)를 의지할 것이니 무(無)에서 허(虛)를 살피고 허에서는 다시 공을 살피고 공세서 다시 유(有)를 살핀다면 어찌 천하의 근원(根源)과 말단(末端)을 보지 못하겠는가? 그렇다고 사람의 눈으로 그것을 어찌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마치 물고기가 물에 의지하여 생(生)과 (死)를 도모하더라도 물 밖의 세상을 헤아릴 수가 없는 것과도 같은 것이리라.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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