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맑고 투명하게 하는 것으로 진실(眞實)보다 더 좋은 것은 드물 것이다. 벗과 벗 사이에서 거짓이 없을 때에 의리가 생기며 남편과 아내가 거짓이 없을 때에 화합이 생긴다. 이 셋은 아름다운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천지자연 가운데에서 물 보다 더 투명하고 맑은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물 가운데에 더러운 물도 있고 독물도 있고 참다운 물도 있다지만 물통 속에 담아져 있을 때에는 어떠한 물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마시려고 보면 그때서야 독물이라는 것을 알고, 더러운 물이라는 것을 알고, 참다운 물이라는 것을 구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하듯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맺고 이 인연의 끝에서 또 하나의 운명(運命)을 만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가 좋은 인연으로 남을 수야 있겠는가?


어쩌다가 좋은 인연이라 싶어 함께 하더라도 그 인연의 끝을 우리는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라오. 위선을 위한 위선자(僞善者)일 수도 있고, 선(善)을 위한 위선자(僞善者)일 수도 있으며, 선(善)을 위한 선(善)한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진실 된 사람과 거짓된 사람으로 굳이 구분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 아래 옹달샘물이 대해(大海)로 흘러들 때의 슬픔을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이유를 알 수가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진실의 가치는 진실이라는 그것으로도 충분하겠지 만은 진실은 인생사에서 힘이 들고 괴롭고 어려울 때에 그것의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이 생(生)을 살아가면서 마지막까지 간직하여야 하는 보석이 되고 이 (生)을 건너는 지팡이가 되며 이 생(生)에서 그림을 그리는 마지막 붓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삶이라 하는 것은 죽음의 세계에서 왔다가 다시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이야기 합니다.

사람의 생(生)이 언제까지나 유(有)의 존재로 남을 수가 없고 언제까지나 젊은이로 남을 수가 있겠는가? 어느 날엔가는 필연코 가야만 하는 길이 우리 사람에게는 숙명으로 주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의 생명에서 다음의 생명으로 태어날 때까지 죽음의 세계에서 머물러야 하는 것은 필연(必然)의 법칙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생명이라는 화로에다가 어떤 것을 담느냐는 곧 죽음의 세계에서 어떠한 영혼을 간직할 수가 있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화로에다가 생나무를 태운다고 불이 타오르겠는가?

생나무를 태울 때에 화로에는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악업에서는 더러운 기운만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마치 지금의 생명에서 악업(惡業)만을 채우고 복(福) 받기를 기원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리라. 그래서야 어찌 다음의 생까지 온화하고 따스한 기운이 피어오르기를 기원이나 하겠는가?


그러므로 지금의 생명에서 만드는 선업(善業)은 다음의 세계를 위한 소중한 재산이 되고 다음의 생을 위한 지렛대가 되며 다음의 생을 위한 물감과도 같은 것이리라 하겠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