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미국에 있으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은 참 많은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글 학교에서 만나는 어린 아이들부터 수업 관찰을 하면서 만나는 중·고등학생 청소년들, 함께 일을 하는 성인 동료들에게까지 나타나는 공통적인 모습이었다.그리고 이들이 하는 질문 중 몇몇 질문들은 '왜, 어떻게 저런 질문은 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바보같은 질문들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일단 사람들은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침묵이 금이다'나 '가만히만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와 같은 말들은 우리 사회가 질문하는 것에 대해 마냥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상 생활을 하면서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이해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 나대는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지시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고 점점 입을 다물게 됐다. 필자도 질문을 하기 전에 '내가 이상한 것을 물어보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가하면 어쩌지?' 등과 같은 생각 때문에겁을 먹고 질문하기를 피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가 "한 사람의 사고나 능력은 그 사람의 대답보다는 질문에 초점을 맞춰 평가할 수 있다"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수많은 지식과 기술의 발달이 "왜 이렇게 되지?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수 많은 질문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연구를 하다 보면 그 질문에 완벽한 답을 내기지는 못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의미 있는 결과들이 나올 수 있다.질문에는 수렴적 질문과 발산적 질문이있다.

수렴적 질문은"우리나라에는 왜 4계절이 나타나는가?" 와 같이 특정 주제에 대해 하나의 답을 향해 좀 더 깊고 정교하게 파고 드는 질문이다. 발산적 질문은 "1년 내내 겨울만 있으면 어떻게 될까?"와 같이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반응을 요구하는 질문이다. 즉, 특정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거나 문제를 자세히 다루기에는 수렴적 질문이 적합하지만 다양한 사고하고 관점을 넓혀서 새로운 시작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는 발산적 질문이 효과적이다.


교사나 상사, 부모처럼 상대적으로 윗사람이 어떤 질문을 하느냐 만큼 중요한 것이 아랫사람들이 하고 싶은 질문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어떻게 만들어주느냐에 대한 고민이다.질문을 한다는 것은 일단 특정 주제에 대해서 관심과 알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것이고, 주변 사람들은 이를 독려해줄 필요가 있다. 우리 가정이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궁금한 것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안전한 환경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특히, 아이들의 질문을 대할 때도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무안을 주기 보다는 질문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한 관심과 질문에 대한 생각을 대화를 통해 공유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수많은 현명한 질문에 대해 어리석게 답함으로써 무한한 가능성과 가치를 성장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 해본다.



/이지영 미국 미시간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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