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육신(肉身)의 근원이 되는 물(水)과 정신의 근원이 되는 영(靈)과 마음의 근원이 되는 혼(魂)의 활동으로 생리적 기능뿐만 아니라 정신적 활동과 이치에 따르는 생명체로서 시·공간적인 현상계를 초월하고 차원의 한계성을 두지 않으면서 광대하고 신비로운 활동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육신과 정신과 마음이 조화로운 상태에서 우주계의 이치와 더불어 건전한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운명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활동을 하는 기운(氣運)이 이치의 세계에서 머물고 있는 상황을 운성(運性)이라고 말을 하기 때문에 운성은 운명을 바치고 있는 받침대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운명은 현상계에서의 작용과 기능과 활동이라고 한다면 운성(運性)은 우주계(宇宙界)에서 작용을 하고 존재하면서 운명을 돕는 조력자(助力者)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운명의 결정론이냐 아니면 스스로가 개척을 하여야 하느냐의 개척론을 논(論)하기보다도 주어진 생명에서 얼마나 행복할 것이며 만족할 것이냐의 문제가 먼저 대두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때에 조금 더 행복하고 성숙한 삶을 영위하며 끝없는 우주계에서 영혼(靈魂)의 순수함을 유지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정으로 자신의 운성(運性)에서 그 순수함을 유지하고 이렇게 주어진 운명이 다른 세계로 넘어갈 때에는 우주계의 일원(一員)으로써 그 사명을 어떻게 행(行)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 자신의 법도(法度)를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운명의 토대가 되고 이치가 되며 법도가 되는 운성(運性)을 이야기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거짓이 없는 곳에는 진실(眞實)이 있고, 진실한 곳에는 믿음(信)이 있으며, 믿음이 있는 곳에는 인화(人和)가 있고, 인화가 있는 곳에는 충만(充滿)함이 있으며, 충만(充滿)함으로써 평온은 깃들게 되는 것이다.


온화한 것은 토기(土氣)가운데에 있고, 단단하고자 하는 것은 금기(金氣)에 있고, 내리고자 하는 것은 물(水氣)에 있고, 오르고자 하는 것은 나무(木氣)에 있고, 급박하게 서두르려고 하는 것은 불(火氣)가운데 있다. 그리고 사람은 마음의 기운(氣運)에서 혼체(魂体)가 머물고 그 혼체(魂体)속에서 길흉(吉凶)이 뒤따를 때마다 마음 또한 함께 변화하며 변화하는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곳을 일러서 육안(肉眼)의 빛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善)한 기운(氣運)의 눈빛이 지속되면 필경 얼굴에 웃음꽃이 머물고 악(惡)한 기운(氣運)이 지속된다면 필경 얼굴에 슬픔을 보이게 될지 나니 머지않아서 기쁜(喜)소식과 슬픈(悲)소식 또한 생겨나지 않겠는가? 까닭으로 마음의 평온을 운성(運性)이 일반적이라고 하는 이유에서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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