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무호(號)가 '영원한 숙적' 일본을 꺾진 못했지만 동아시아 축구 정상에 올랐다.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은 23일 오후 중국 충칭 올림픽스포츠센터에서 열린 2008 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최종전에서 전반 14분 '황금 왼발' 염기훈의 선제골로 앞서 갔지만 후반 22분 야마세 고지에게 뼈아픈 동점골을 내줘 1-1로 비겼다.

이로써 1승2무(승점 5)가 된 한국은 일본(1승2무)과 승점이 같지만 다득점에서 앞서 2003년 이후 5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우승 상금 50만달러도 따냈다.

골득실(+1)까지 같지만 다득점에선 한국이 득 5, 실 4로 일본(득 3, 실 2)에 앞섰다.

2003년 제1회 대회에서 우승한 한국은 2005년 국내에서 펼쳐진 제2회 대회에선 꼴찌로 처지는 수모를 당했지만 3회 대회 우승으로 최다(2회) 우승국이 됐다.

이어 열린 남자부 마지막 경기에서 북한은 중국에 1-3으로 역전패, 2무1패(승점 2)가 되면서 최하위로 처졌고 개최국 중국은 1승2패(승점 3)로 3위가 됐다.

한국 축구는 일본과 역대 전적에서 38승20무12패로 우위를 점했지만 2000년 이후 대결에선 2승4무2패로 팽팽한 균형을 깨지 못했다.

선제골을 뽑아낸 염기훈은 2003년 5월31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전에서 후반 41분 안정환의 득점 이후 네 경기 만에 일본의 골문을 열어 지긋지긋한 일본전 318분 무득점 터널에 마침표를 찍었다.

10년 만에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한.일 국내파 사령탑 허정무 감독과 오카다 다케시 일본 감독의 대결도 일진일퇴 공방 끝에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박주영, 고기구의 부상으로 공격 병기를 죄다 잃은 허정무 감독은 두 번째 a매치에 나온 조진수와 측면 요원 염기훈을 짝지워 투톱으로 놓는 3-5-2 전략을 구사했다.

오장은과 김남일, 조원희가 삼각형으로 중원을 짰고 이종민, 박원재가 좌우 날개로 꽂혔다. 스리백(3-back)엔 강민수, 조용형, 곽태휘가 방어막을 쳤고 '상무 불사조' 김용대가 수문장을 맡았다.

역시 부상병동 대표팀에 시름한 오카다 감독은 다시로 유지를 원톱에 놓고 중국 격파의 주인공 야마세의 돌파에 기대를 걸었다.

노련한 엔도 야스히토가 공수 조율을 맡아 김남일과 조우했고 나카자와 유지가 포백 수비진을 이끌었다. 베테랑 가와구치 요시카스가 골문을 지켰다.

희뿌연 안개 속에 숙명의 대결이 시작되자 태극전사들이 주도권을 쥐었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에서 일본(35위)이 한국(41위)보다 앞서지만 정신력 싸움에선 태극호가 기선을 잡았다.

초반 염기훈이 오른쪽 측면에서 아크 뒤 공간을 봤고 김남일이 논스톱 땅볼 슛으로 골문을 위협했다. 가와구치가 화들짝 엎어져 가슴팍으로 막아냈다.

7분엔 이종민의 발리 슛과 이어진 염기훈의 코너킥이 일본 수비진을 흔들었다.

마침내 전반 14분 굳게 닫혔던 '울트라 닛폰'의 벽을 허물었다.

해결사는 '왼발 스페셜리스트' 염기훈.

박주영의 공백을 메우라는 특명을 받은 염기훈은 박원재가 왼쪽 측면으로 파고들자 일본 수비수 틈바구니에서 잔뜩 도사렸다.

박원재의 크로스가 그라운드에 한 번 바운드된 다음 휘어질 때 염기훈은 갑자기 허리를 틀어 '100만불짜리 왼발'을 공중에 띄웠다.

정확한 타이밍에서 걸린 발리슛은 일본 골라인 앞에서 속도가 더 빨라져 골문 왼쪽 네트를 깨끗하게 갈랐다. 몸을 던진 가와구치가 눈물을 쏟아야 할 결정적 한 방이었다. 가와구치는 왼손으로 땅을 쳤다.

이후 '오카다 재팬'의 반격이 거세졌다.

전반 16분 나카무라 겐고의 중거리포가 오른쪽 골대를 강타하고 나갔다.

미드필드 압박을 강화한 일본은 34분 프리킥 혼전 후 흘러나온 볼을 나카무라가 다시 왼발 미사일 슛으로 연결했다.

김용대가 동물적인 순발력으로 주먹을 뻗쳐 가까스로 볼을 크로스바 위로 쳐냈다.

42분 오장은이 이종민의 크로스를 헤딩슛으로 날려졌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전반 막판엔 오른쪽 측면 우치다에게 2대1 돌파를 허용해 실점 위기를 맞았지만 조용형이 육탄 방어로 막았다.

숨막히는 공방을 끝내고 맞이한 후반 초반 태극호가 다시 공세를 펴는 듯 했다.

'허정무호 블루칩' 곽태휘가 공격에 가담해 헤딩슛을 시도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후반 10분 일본 코너킥이 다시로의 머리에 맞으면서 불안감이 드리워졌다.

김남일 대신 19세 신예 구자철, 조진수 대신 이근호가 들어간 한국은 결국 세트플레이에서 뼈아픈 실점을 허용했다.

허정무호의 뒷문을 뚫은 적병은 야마세였다.

코너킥을 짧게 연결하는 변칙 플레이를 편 일본은 패스를 잘라 페널티지역 외곽에 있던 야마세에게 연결했고 야마세의 오른발 캐넌슛이 불을 뿜었다.

수비진은 기습 세트피스에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야마세를 무방비 상태에 놓아줬고, 야마세의 슈팅은 김용대가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오른쪽 골대를 스치며 골문에 빨려들었다.

기세가 오른 일본의 공세를 끈질긴 수비로 막아낸 허정무호는 후반 막판 두 차례 프리킥 찬스를 잡았지만 마무리가 무뎠고 그대로 종료 휘슬이 울렸다.

<사진설명=23일 오후 중국 충칭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동아시아 선수권대회 대 일본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한국 대표팀이 응원단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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