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편> 장내리는 명실 공히 동학 교단의 중심지

▲북실 동학공원 조감도. 수 차례 설계 변경을 거쳐 이상한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보은은 동학 포교의 중심지였고 보은취회와 9월 재기포에서 북실 마지막 전투에 이르기까지 동학혁명사의 폭풍 중심에 놓여 있었다.

창도주 최제우가 선전관 정운구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 될 때 호송 행렬이 상주 화령을 거쳐 보은 관아로 들어왔을 때 동학교도 이방이 최제우에게 예물을 바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보은 지방에 동학이 유입된 시기는 창도 초기인 듯하다.


이는 경주에서 핍박을 받은 동학교도 상당수가 상주 왕실촌으로 피신을 했는데, 이들이 속리산을 넘어와 포교한 것으로 보인다.

보은은 상주에서 팔음산을 넘어 청산으로 통하는 길이나 추풍령을 넘어 황간 청산으로 통하는 길, 영동 무주로 통하는 사통팔달의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동학이 활발하게 유통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민중의 역량 결집된 보은취회

장내리는 최시형의 도피처였고 동학교단의 중심지가 되었다. 1886년에 육임제를 두어 포 조직 강화와 함께 동학 교세가 확장되자 대도소가 있는 보은은 공주집회와 삼례집회 광화문복합상소 보은취회를 주도하는 교단의 핵심지가 된다.

1893년 3월, 최시형은 창도주 최제우의 조난향례날을 맞아 결단을 내려 보은취회 통유문을 낸다.

장내리에는 충청 전라 경상 경기 강원 등 전국 각지에서 수만 명의 교도가 운집했는데, 그 기세가 이웃고을 청산 문바위까지 뻗쳤다.

교도들은 반장 높이의 돌 성을 쌓았고, 각 포에는 대접주가 있어서 질서정연하게 포를 통솔하여 동학주문을 암송했다.

그러면 보은취회는 여태까지 있어왔던 삼례 공주집회와 어떻게 다른가. 먼저, 군수에게 보내는 집회통문과 충청감사에게 보낸 방문 내용이 지금까지의 교조신원운동과 달리 보국안민 척양척왜 와 같은 민중들의 현실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즉, 안으로는 부패한 탐관오리에 대한 저항과 외세침략에 대한 경계를 내세운 사회운동으로 발전하면서 사회적인 명분까지 얻게 되었다.

이렇게 보은취회는 지배질서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총체적으로 결집하여 봉건지배 계층에 저항할 이념을 제공함으로써 민중운동의 전환기적 국면을 맞게 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 동학혁명군, 공주성 공격 준비

1894년 9월 18일, 최시형이 마침내 지금은 앉아서 죽음을 당하기보다는 일어나 힘을 합하여 싸울 때 라며 무력봉기를 선언하자 경기 충청 강원 지역에서 봉기 한 동학혁명군이 장내리에 집결한다.

1년 6개월 만에 다시 옥녀봉 아래 천변에 400여 개소의 초막을 짓고 유숙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보은 문의 청주 동학혁명군이 합류하여 2만여 명으로 늘었고, 영동 옥천 청산 지역에서 1만 여 명이 청산 작은 뱀골에 모였다.

최시형은 손병희를 통령(統領)으로 임명한다. 손병희는 1만 명의 동학혁명군을 이끌고 논산을 향해 출발하여 호남의 전봉준 군과 합류한다.

옥천 황간 영동의 동학혁명군은 회덕지명장터에서 관군을 물리친 뒤 공주 동북쪽 대교(大
橋한다리)로 진출하여 공주 성을 포위 공격할 태세를 갖춘다.

# 보은 일대 참혹한 전쟁

주력이 보은 장내리를 떠난 뒤, 11월 5일에는 청산석성리에서, 11월 8일에는 양산 장터싸움이 벌어지고 관 유회군의 토벌전이 벌어져 보은 일대는 참혹한 전화(戰禍)에 휘말리게 된다.

한편, 공주에서 합류한 남북접 동학연합군은 공주성을 눈앞에 둔 우금치에서 애석하게 패하고 만다.

남접군은 금구 원평 전투를 끝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군은 임실 새목터까지 후퇴한다.

여기서 최시형과 합류하여 근거지인 충청도를 향해 소백산맥을 따라 북상한다.

12월 9일 장수 무주를 거쳐 영동까지 올라오는 동안 18차례 싸움을 벌여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들은 13일 청산으로 들어가 15일까지 머물다가 관 일본군이 추격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17일 저녁에는 비운의 땅북실로 들어온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동학혁명군은 관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비참한 살육을 당한다.

동학혁명군은 다음날 아침까지 저항했으나 총탄이 떨어져 바로 전투력을 상실했다. 전투가 끝난 뒤 일본군의 눈에 비친 참상을 시체는 눈 덮인 북실 곳곳에 서로 베개를 삼 듯 겹쳐져서 골짜기를 가득 메워 몇 백 명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라고 적었다.

그러면 동학혁명군 희생자는 얼마나 될까. 일본군기록은 전투 중에 총을 맞고 죽은 수를 300명으로, &amp;amp;amp;amp;lt;소모사실&amp;amp;amp;amp;gt;에는 395명, &amp;amp;amp;amp;lt;토비대략&amp;amp;amp;amp;gt;에 爲亂砲所斃者二千二百餘人夜戰所殺爲三百九十三人(난포에 죽임을 당한 수가 2,200여인이고 야간 전투에서 살해된 수는 393인) 이라 밝히고 있다. 이들의 시신은 북실 곳곳에 집단 매장되었다.

▲ 장내리 사적지 훼손현장.



# 역사없는 북실 동학공원

보은군은 이런 비운의 땅 북실에 2003년부터 현재까지 공원 조성비 70억여 원을 투입하여 역사와는 거리가 먼 이상한 동학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적이 없는 돌성이 구축되고, 내구성이 없는 나무 계단을 만들어 오히려 자연을 심하게 훼손시켰다.

이에 대해 지난 해 4월 충청지역 시민연대에서 의혹을 제기하고 군에 사업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지만 무살한 채 현재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최근 충북지역 동학혁명 기념사업회가 발족되면서 보은군에 장내리 취회지 와 북실 동학군 집단매장지 가 국가 및 도 사적지로 지정되도록 이에 필요한 행정 절차에 임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지만 군으로부터 사료 부족으로 인한 사적 지정 불가 라는 터무니없는 회신이 왔다.

학계는 이미 두 지역에 대한 사적(史蹟)은 물론 역사적 의의를 평가했다.

특히 공주집회 삼례집회는 보은취회의 전사(前史)로 사적지 지정은 물론 이미 기념사업이 진행됐다.

그 사이 장내리는 묘지 조성 사업, 우사 건축, 개인주택에 이르기까지 역사 현장이 심하게 훼손되었고, 북실 집단매장지는 개간 사업이 진행되었거나 돼지막사가 들어서 있다.

장내리와 북실이 사적지로 지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지역의 역사적 특성을 살린, 사회단체는물론 주민들의 의견이 총체적으로 결집된 기념사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 장내리 취회터. 역사의 현장이 경지정리 공사에 들어갔다.


채길순 소설가 &amp;amp;amp;amp;middot;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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