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편> 전파와 투쟁, 학살의 중심

경기ㆍ충청 동북부 성난 교도의 집결지

음성은 지리적인 여건으로 볼 때 서울&amp;amp;amp;amp;middot;경기와 인접하고, 길이 사통팔달로 통해 있어서 동학교도의 활동이나 역할이 각별했다. 음성은 소백산맥을 넘어온 동학을 전수받아 경기&amp;amp;amp;amp;middot;충청지역으로 전파하고, 보은취회와9월 재기포 때는 경기&amp;amp;amp;amp;middot;충청 동북부 지방의 동학교도들이 모이는 거점이었다. 이들은 보은으로 이동하여 공주전투에 참가했다가 패퇴한 뒤 돌아오는 길에 보은 북실에서 또 참패하고 쫓겨 와 음성 되자니(道晴里)에서 다시 공격을 받아 흩어진다. 동학혁명이 끝나고 나서도 관과 민보군의 보복 학살이 자행되었다.

일찍이 교단이나 관 기록에 &amp;amp;amp;amp;lsquo;忠州 米山居 東學大接主 辛在蓮&amp;amp;amp;amp;rsquo;의 활약상이 나타나는데, 미산은 현재 음성군 대소면 내산리 미산마을이다. 음성 지방의 동학활동은 주로 &amp;amp;amp;amp;lsquo;충주 외서촌(外西村) 지역&amp;amp;amp;amp;rsquo;으로 기록되었다. 외서촌은 음성 지역을 이르는 말로, 오늘 날 행정구역상 금왕읍, 삼성면, 대소면, 맹동면, 감곡면, 생극면 일대를 가리킨다. 1893년 교단의 조직 개편에서 &amp;amp;amp;amp;quot;충주 외서촌 황산에 손병희와 이용구의 포소가 설치되고, 청풍에는 성두한 포소가 설치되어 교도를 관할했다&amp;amp;amp;amp;quot;는 기록으로 미루어 음성은 충주 청풍 괴산 지역과 함께 1880년대부터 동학 교세의 주류였음을 보여준다.

동학혁명 시기에 손병희(청주 금암리) 신재련(음성 대소) 이종석(진천 부창리) 세 사람이 모여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형제의 결의를 다져서 음성 지방에는 일찍부터 혁명 기운이 감돌았다.

9월 18일 교단의 재기포 선언이 있기 전부터 경기도 지방과 음성에 동학군이 집결하여 죽산의 관군과 대치하면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재기포 선언이 있자 음성 지역에는 경기&amp;amp;amp;amp;middot;강원&amp;amp;amp;amp;middot;충청도 북부 지역의 동학교도가 모여들기 시작 한다.

관 왜군과의 급박한 대치

9월9일, 동학혁명군이 경기도 죽산과 안성에서 봉기하여 관아를 점거하자, 다급해진 조정에서는 동비(東匪) 토벌을 위해 9월 10일 죽산부사에 장위영 영관 이두황과 안성 군수 성하영을 경리청 영관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급파한다. 이는 교단의 9월 18일 재기포령 이전 상황이다.

▲① 음성 되자니(道晴理)는 동학혁명군의 마지막 저항지다.이곳은 최시형이 1878년 육임소 박해 때 은거했던 곳이기도 하다.

② 동학 연구가 이기준씨가 그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동학혁명 뒤 향반사회의 갈등이 기록돼 있는 李郭抱寃錄(이곽포원록)

③ 괴산접주 이헌표는 양반신분이면서도 동학에 입도하여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그에 대한 자료는 이름뿐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두황은 9월 20일 장위영병을 이끌고 서울을 출발한다. 당시 관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 이후 경군으로부터 압수했던 모젤총 400정과 탄약 4만발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이두황이 용인 양지를 거쳐 22일 죽산의 백암장터에 도착, 다음날 죽산 관아에 도착하자 곧바로 비봉산에 진을 치고 광혜원과 음성 지역에 주둔한 동학혁명군의 공격에 대비한다.

충주 용수포에는 5&amp;amp;amp;amp;sim;6만을 거느린 서장옥이 웅거하고, 진천 광혜원에는 신재련이 4&amp;amp;amp;amp;sim;5만을 거느리고 민보군 허문숙과 대치하여 접전 일보직전에 있었다. 당시 황산에는 이종훈 이용구와 같은 이 지역 지도자를 비롯하여 충주, 안성, 양지, 여주, 이천, 지평, 광주, 원주, 횡성, 홍천 등 여러 지방의 교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위세는 비봉산에 주둔한 관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관군이 사창리로 들어와 황산의 동학혁명군과 대치한다. 당시 선유사 정경원이 동학혁명군과 담판을 벌였지만 별 성과 없이 사창리에서 10리 밖 성산으로 물러난다.

9월 26일에 음성읍이 동학혁명군에 의해 함락되자 음죽 가도 상에 있던 황산 동학혁명군은 허문숙의 민보군과 진천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을 시작하여 도청리 유포리를 지나 덕산 구만리 장터에 주둔한다. 동학혁명군이 허문숙의 민보군을 공격하여 패퇴시킨 뒤 29일 진천 관아를 점령한다.

마지막 저항 되자니 전투



10월 초 광혜원의 동학혁명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삼호리에서 전투를 치르고 무극으로 이동하였고, 진천 관아를 공격한 뒤 구만리 장터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혁명군도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무극으로 이동한다. 일본군이 계속 압박해오자 동학혁명군은 무극을 떠나 감우재를 넘어 괴산 당동으로 이동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고 보은으로 들어간다.

한편, 10월 24일에 무극 노백룡 정택진 전만철 등이 목천 세성산 전투 뒤에 붙잡혀 포살 당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진천 음성 괴산 등지의 주력 동학혁명군이 보은으로 이동하고 또 다른 세력이 목천 세성산 전투에 진출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보은으로 이동한 동학혁명군은 공주전투에서 일본군의 신식 무기 앞에 원통하게 패퇴하여 남원 새목터까지 후퇴했다가 소백산맥을 타고 북상, 다시 보은 북실에서 관왜군의 신무기 앞에 대학살을 당한다.

살아남은 동학혁명군은 지칠 대로 지쳐 화양동을 거쳐 음성 되자니(道晴里)로 들어온다. 이곳은 최시형이 1878년 육임소 박해 때 은거했던 곳이다. 12월 24일, 되자니로 들어온 북접 동학혁명군 간부들은 관군의 공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최시형은 마르택 이상옥 집으로 피신하고, 손병희, 홍병기, 이승우, 최영구, 임학선 등은 죽산 칠장사로 들어갔다가 여기서 다시 관병의 공격을 받는다. 당시 일본 측 기록도 참혹하기 짝이 없다.

&amp;amp;amp;amp;ldquo;13일 가흥으로부터 파견된 정찰대는 17일 장호원과 음성 사이에서 제 16대 이시모리(石森) 중위의 지대와 만났으며, 때마침 적도 수백 명이 내습해 오므로 같이 협력해서 이를 맞받아 싸워 수십 명을 죽이고 우리 병사는 1명이 부상했으며, 적도는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amp;amp;amp;amp;rdquo;

동학혁명의 전화가 휩쓸고 지나간 뒤 관 민보군의 보복은 자못 처절하다.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은 관군과 민보군의 추적 대상이 되었다. 신니면 원평리 가섭산 도둑골은 해골이 발에 채일 정도로 수많은 동학혁명군이 관군 민보군에게 도륙을 당한 곳으로 알려졌다.

수백 명의 동학혁명군을 모아 보냈던 이헌표 접주는 그들이 돌아오지 못하자 가족들의 원성을 피해 마을을 등지게 되었고, 그가 남긴 &amp;amp;amp;amp;lt;李郭抱寃錄(이곽포원록)&amp;amp;amp;amp;gt;은 동학혁명 이후 향반 사회의 동학교도와 비교도, 그리고 관아와 민중이 겪는 갈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이다.





채길순 소설가 &amp;amp;amp;amp;middot;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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