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편> 옥천ㆍ청산 문바위골은 동학교도 `작은 장안`

▲문바위 쪽에서 본 청산 면소재지. 이곳에 청산 관아가 있었지만 동학교도들이 번번하게 들나들던 곳이다.


옥천 지방 동학은 창도시기에 유입되었고,장내리 집회 때 청산 문바위골은 작은 장안 라고 불릴 만큼 동학교도들의 출입이 빈번했다.

문바위는 동학 교단의 주요 문제를 결정하던 곳이며,9월 재기포령을 내렸던 역사의 현장이다.

현재 동학혁명 사적으로는 청산 문바위에 최시형이 은거했던 집터,이 마을 저수지 위에 9월 재기포 시기에 동학혁명군이 둔취하고 출정 준비를 했다는 훈련터, 최시형의 아들 최봉주의 묘 가 전해지고 있다. 특히 9월 재기포 시기에 옥천 지역 곳곳에서는 관 일본군 혹은 유림 세력으로 구성된 민보군에 의해 많은 동학 지도자들이 참살되었다.


# 창도기 유입된 동학교도의 통로

동학 창도시기에 최제우가 &amp;amp;amp;amp;quot;옥천 이웃 고을인 금산진산 지례 김산 등지에 직접 포교&amp;amp;amp;amp;quot;하였고, 창도기에상주 왕실촌에 피신했던 동학교도들이 상주 모서(牟西) 팔음산(八音山)을 넘어 청산으로 넘나드는 통로때문에 옥천과 청산은 일찍이 동학교도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옥천은 황간 조재벽(趙在壁) 대접주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동학혁명 초기인 4월에는 황간 영동 옥천 지역의 동학혁명군을 이끌고 금산으로 진출하여 금산장 진산 싸움을 벌이게 된다.

▲ 동학기념비보다 화려한 청산 자랑비.

최시형이 청주 손병희와 황간 조재벽의 주선으로 문바위골 김성원(金聖元)의 집으로 들어온 시기는 1893년인데, 3월 최제우의 조난 일을 맞아 청산군 포전리 김연국의 집에서 손병희 이관영 권재조 권병덕 임정준 이원팔 등과 제례(祭禮)를 지냈다 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문바위는 보은 장내리와 함께 동학교단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장내리 집회 때에도 이곳 문바위 골짜기는 전국의 동학교도들이 출입이 빈번하여 물가에 버드나무 숲은 당시 전국 각지에서 말을 끌고 온 동학교도들이 고삐를 맸던 버드나무 말뚝이 살아 뒷날 버드나무 숲이 되었다고 전한다.

1894년 3월 무장 기포가 일어나자 충청도에서도 산발적으로 동학 교도들의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 때, 문바위 작은뱀골 골짜기에도 동학교도들이 모여 소요를 벌였고, 바위에 주동자인 박희근(朴晦根) 김정섭(金定燮) 박맹호(朴孟浩) 김영규(金永圭) 김재섭(金在燮) 박창근(朴昌根) 신필우(申弼雨) 7명이 이름을 음각하여 목숨을 건 투쟁을 결의한다.

이는 둥글게 돌아가며 이름을 적음으로써 주동자를 숨겼던 사발통문 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목숨을 건 매운 기개 를 보이고 있다.

1894년 9월 18일 최시형은 마침내 문바위골에 동학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무력 봉기를 선언하자 전국의 동학혁명군이 장내리와 청산 문바위로 모여든다.

문바위 저수지 위 갯밭에서 충청ㆍ경상ㆍ경기ㆍ강원 지역에서 온 동학혁명군들이 전라도 동학군과 논산에서 합류하러 갈 때까지 훈련 했다고 전한다.

▲ 문바위 가는길. 이 곳은 최시형이 은거하면서 동학혁명을 지도했던 역사의 땅이다.
# 양반지배세력 - 동학교 갈등 심해

동학 혁명군 주력이 공주 대회전 중이던 11월 8일에는 양산 장터 싸움이, 11월 5일에는 청산 석성리 싸움이 벌어져 이 일대는 전화(戰禍)에 휘말렸다.

당시 상주 소모영장 김석중은 정탐꾼이 옥천 고관리 등지에 최시형이 은거해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큰 공을 세우려고 이 일대에 대한 토벌 전에 나선다.

이와 동시에 옥천지역 유림으로 구성된 민보군의 12명의 지도자(김재빈, 박주양, 김규항, 김재소, 김중현, 송병기, 전맹호, 김영희, 민치용, 유형로,박성환, 박정빈)가 토벌전에 나선다.

이런 사실(史實)은 옥천 고을 양반 지배 세력과 동학 교도 간의 갈등의 골이 깊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음은 정부에서 파견한 경리청군, 김석중이 이끄는 상주 소모영군, 일본 후비 보병 19대대 병력, 민보군이 벌인 정토(征討) 기록이다.

① 1894.11.18, 화서 대골【垈谷】에서 청주 대접주 김자선(金子先) 접사 서치대(徐致大) 접주 정항여 (鄭項汝)를 체포, 이튿날 화령에서 포살

② 1894.11.19, 보은 장내리 뒷동네에서 거괴(巨魁) 김민이(金民伊) 원성팔(元性八)을 체포

③ 1894.11.20, 광주원(廣周院) 장수리에서 김달문(金達文) 김철명(金哲命) 포살. 봉암동 연기군 서면에서 김민이 포살

④ 1894.11.23, 청산 박부만(朴富萬) 이치오(李致五) 김순천(金順天) 외3인을 청산에서 포살

⑤ 1894.11.24, 가항(駕項멍어목이)에서 김항우(金項羽) 박여창(朴始昌) 체포, 묘막(墓幕)에서 정한(鄭汗) 체포

⑥ 1894.11.27, 와지(瓦池청산면 대성리)에서 접사 여성도(呂聖度) 체포

⑦ 1894.11.28, 남진갑(南進甲)을 월남점(月南店)에서 포살

⑧ 1894.11.30, 팔로도성찰 강경중(姜敬重副省察) 허용(許用)을 청산 동시(東市청산면 법화리)에서 포살

⑨ 1894.12.2, 차남리(車南里청산면 삼남리)에서 대장 徐五德을 체포, 전날 생포한 김경연과 서오덕을 소사동(小巳洞ㆍ작은 뱀티)에서 포살

⑩ 1895.1.9, 옥천 이대철(李大哲利原驛省察) 장명용(張命用) 이오룡(李五龍) 고덕현(高德賢, 梧井洞接司) 고원행(高遠行, 接司) 고경일(高敬一)을 무주에서 포살

따라서 이 근동에는 동학 후손들이 많다. 큰뱀티(삼남리)에서 서오덕 대장의 후손 서정희 씨를 만나 큰할아버지(서오덕)가 동학군으로 총을 맞아 고생끝에 돌아가셨다 고 했다.

# 숨죽이며 살았던 동학 후손들

족보에 서석규(徐錫奎자 元瑞1856-1894)의 사망일시는 12월 1일로, 상주 소모영의 포살 기록과 일치한다.

아마 서오덕은 동학 혁명군 주력이 공주로 이동하고 나서 지역 방어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제촌 숯먹이(수묵이) 삼실【麻谷】등지에도 배안순(裵安順) 이판석(李判石)접사를 처형했다는 관 기록과 일치하는 동학 유족들이 살고 있었지만 자신이 동학 후손이라고 나선 것은 최근의 일이다.


채길순 소설가 &amp;amp;amp;amp;middot;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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