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포럼] 정연승ㆍ소설가

▲정연승 소설가
방목(放牧)이라는 뜻풀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집짐승을 놓아서 기름이라고 풀이해놓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구속함이 없이 완전한 자유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방목은 완전한 자유로움이 아니라 일정한 틀 안에서의 자유로움이다.

내가 ‘방목’으로 가훈을 전한 것은 두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였다. 이 녀석들이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심심찮게 요구하는 ‘‘가훈 ’적어오기’에 나는 한동안 망설였었다.

그러다 언뜻 생각해낸 것이 방목이었다. 아내는 무슨 가훈이 그러냐고 펄쩍 뛰었지만, 그 이후 나는 누가 물어볼 때마다 “우리 집 가훈은 방목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해주었다.

그러면 열이면 열 사람이 모두 웃었다. 방목=방종이거나, 방목=탈선으로까지 유추했으리라. 아내가 펄쩍 뛰고, 사람들마다 웃어댄 것도 그 이유에서였으리라.

아이들이 그 가훈을 적어 가지고 학교에 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 십중팔구, 그 가훈은 제 엄마의 의도에 따라 다른 것으로 바뀌어 제출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 녀석들의 자율이니까. 그래서 나는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면 녀석들의 생활이나 두 녀석의 다툼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가끔 아내와 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학생들이 있는 집들은 모두 그러하겠지만, 우리 집 또한 아침만 되면 아수라장이다. 조금이라도 더 자려는 녀석들과, 지각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 학교에 가라는 아내의 성화 받친 목소리가 아침 정적을 깨뜨린다.

조금의 변화도 없이 매일처럼 반복되는 그 일에 때론 화가 치밀어 오히려 애태우는 아내를 질타할 때가 있다.

아내는 무관심이라는 말로 나를 몰아 세우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정도 지나치면 병이 되고, 관심도 지나치면 참견이 되고, 오히려 반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아내 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챙겨준다. 언제까지 그렇게 하려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만큼 아이들은 스스로 설 수 있는 시간이 늦어지게 된다.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어야 한다. 굽은 나무는 묘목일 때 바로 잡아주어야 쉽다. 다 자란 후에 잡으려고 하면 힘도 배가 될 뿐 아니라 부러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 가훈을 방목으로 삼았다. 가훈이라면 남들에게 자랑스럽고 폼 나는 것이어야 한다는 통속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가훈은 언제까지나 액자 속에 넣어져 그저 눈요기 감이나 되는 상징밖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 갇힌 짐승을 방목한다는 것은 완전히 풀어놓는다는 것이 아니다. 좁은 우리에서 벗어났다는 것뿐이다.

그 밖으로는 더 넓은 울타리가 있고, 그만큼 스스로가 헤쳐나가야 할 일과 책임 질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을 방목하는 대신 때때로 책임을 쥐어주는 것도 그 이유에서이다.

지금은 이 아이들이 훌쩍 자라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래도 나는 이 가훈을 고수하고 있다. 가훈을 만든지 십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이들은 여전히 스스로 아침에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오늘 아침도 여느 날처럼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나는 자고있는 녀석들의 방으로 가 녀석들의 귀에다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야, 니들 학교 가기 싫지? 그럼 가지 마. 대신 내일 학교 가서 뒷 일은 니들이 책임 져!"
녀석들이 부시시 일어나서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