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편> 충청지역 동학 유입의 관문

▲괴산군은 갑오년 당시 전화의 상처로 황폐화 되었다. 사진은 복원 중인 홍범식 생가. 그 너머에 괴산향교가 보인다. &amp;amp;amp;copy; 충청일보

괴산에는 일찍이 이헌표(李憲表) 접주가 활동했는데 양반 신분이다. 이헌표는 특이하게 동학교단 기록은 물론 관이나 일본 기록에도 언급되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신니면 선당리와 음성읍 용산리로 거주지를 이동하면서 최시형의 은거지를 주선하고, 동학교도들을 전투에 참여시킨다. 일본공사관 기록에는 &amp;amp;amp;ldquo;괴산 근동에는 외서촌에 신재련(辛在蓮), 청풍의 성두한(成斗漢), 괴산의 홍재길(洪在吉)이 활약한다&amp;amp;amp;rdquo;고 보고돼 있을 뿐 이헌표에 대한 언급은 없다.
괴산 읍으로 들어섰을 때는 긴 겨울 가뭄을 적시는 단비가 내리고 있었다. 물안개를 피워 올리는 괴강을 낀 괴산 읍은 짙은 비안개에 젖어 있었다. 군에서는 &amp;amp;amp;lsquo;청정 지역 고추 고을&amp;amp;amp;rsquo;을 자랑하고, &amp;amp;amp;lsquo;군 교육기관 유치&amp;amp;amp;rsquo;를 희망하는 플래카드가 곳곳을 수놓고 있었다.

괴산 땅에 동학이 유입된 시기는 충청도 어느 고을보다 빠른 것으로 보인다. 동학교도 박남(朴南)의 &amp;amp;amp;lsquo;일기&amp;amp;amp;rsquo;에 &amp;amp;amp;ldquo;신미 년(1871)에 영해 접주 이필제가 영해 현으로 쳐들어갔다가 실패하고 문경 천마산성에서 재기를 모색할 때 괴산에서 12명의 교도들이 군량을 거두어 호응하였다&amp;amp;amp;rdquo;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1870년대 초기에 이미 동학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까지 칠성면 일대에 후손 동학교도들이 확인되기도 했다.

기록을 종합하면 괴산&amp;amp;amp;middot;단양 지방은 1970년대 산악지대에 의존한 비밀 포교로 일찍이 동학이 유입되었고, 1880년대에는 동학 세력이 평야지대로 확장되는, 말하자면 괴산은 교두보였다.

1885년에 충청 관찰사 심상훈과 단양군수 최희진이 동학의 조직 확장을 알아 차리고 동학지도자 체포령을 내렸고, 1889년 7월에 다시 탄압이 가중되자 2대 교주 최시형은 보은 장내리에 설치했던 육임제를 폐지하고 괴산 신양동에 은거한다. 이 때 관원이 들이닥쳐 동학의 거두 강무경(姜武卿) 방병구(方秉九) 정영섭(丁永燮) 조상갑(趙尙甲) 등이 잡히고, 10월에는 서인주(徐仁周 &amp;amp;amp;middot; 일명 서장옥) 강한형(姜漢馨) 신정엽(申正燁) 등이 체포된다.

특히 서인주는 최시형이 각별히 아끼는 인물이었으며, 호남 지방 동학 활동에 영향을 끼친 강경파다. 실제로 서장옥은 청주성 전투와 금산 진산 전투를 주도했고, 신정엽은 서울 거주자로 뒷날(1895) 재판을 받은 인물이다. 신양동은 괴산 이헌표 접주가 살았던 선당리일 가능성이 크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음성 되자니에최시형이 은거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갑오년 당시 전화에 괴산 읍내 5개마을이 모두 불 타 버리고 이 동헌터만이 남았다. &amp;amp;amp;copy; 충청일보

괴산 읍에는 오래된 건물이 별로 없다. 괴강 건너 서부리에 홍범식 생가와 향교가 있을 뿐이고, 읍내 동부리에는 옛 괴산 동헌 건물이 전부다. 이는 1894년 동학혁명 시기에 두 차례 전란으로 읍내의 집들이 모조리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괴산 읍 전투기록은 당시 일본군 측 기록으로 만날 수 있다. &amp;amp;amp;ldquo;10월 15일 하라다(原田)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27명이 괴산 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급히 출동했다. 괴산에서 음성방면으로 약 6km 쯤 떨어진 당동(唐洞&amp;amp;amp;middot;음성군 원남면 상당 하당리)에 집결해 있는 적군(동학군)과 접전을 벌였다. 약 3만 명을 헤아리는 적군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괴산읍으로 후퇴하려 했지만 이미 읍이 동학군에 의해 점령되어 오후 4시 30분까지 접전을 벌인 끝에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굴현(屈峴&amp;amp;amp;middot;문광면과 청천면 경계인 지경고개) 오리동(五里洞)을 거쳐 다음날 새벽에야 충주 본대(가흥리)로 돌아왔다&amp;amp;amp;rdquo;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 개입은 괴산 군수 이용석이 충주 가흥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사령부에 동학군 토벌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동학 교단 기록에도 &amp;amp;amp;ldquo;이날(10월 6일) 음성방면에서 2만 명, 보은 쪽에서 3만 명이 습격했다&amp;amp;amp;rdquo;고 적어 당시 동학군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전투로 동학군 사상자는 200여 명이고, 일본군은 1명이 즉사하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 가흥 병참 사령부에서는 야마무라(山村忠正) 중대장으로 교체하고, 먼저 도착해 있던 이이모리(飯森) 소좌의 지휘를 받게 했다. 이이모리 소좌는 10일 밤 동학군이 충주와 괴산 사이에 위치한 남창과 월두동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탐 보고를 받고 출동하여 그 날 동학군 1명을 붙잡아 사살하고, 다음날은 10명을 붙잡아 6명을 타살했다는 참혹한 기록이 보인다.

괴산 싸움은 최시형의 9월 기포령이 내려진 뒤 북접 연합군 최초의 대규모의 전투인 셈이다. 이 전투 뒤에 북접 동학군은 보은으로 이동, 논산으로 진출하여 호남 동학군과 대연합군을 형성한다.

▲괴산의 장날. 동학운동 당시 흘러 넘치던 인파에 비해 오늘날은 장꾼들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amp;amp;amp;copy;충청일보

읍내 전투 상황은 관 기록에서 만날 수 있다. 괴산 군수 이용석의 첩정에 &amp;amp;amp;ldquo;대원군의 방시문(榜示文)을 국문과 한문으로 백성들을 두 번 내붙여 효유했으며, 8월 이후 동학도들에게 위압과 형벌을 가한 일이 있었지만 모두 귀화했더니 갑자기 금월 26일에 타 처의 동도 수천 명이 괴산 읍에 쳐들어 왔다&amp;amp;amp;rdquo;고 보고했다. 당동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군이 물밀 듯이 들이닥쳤을것으로 보인다. 이런 중에 괴산 읍내는 또다시 전화에 휩싸이게 되는데, 첩정에 &amp;amp;amp;ldquo;10월6일에는 동학도인으로 처형된 서(徐) 접주의 13세 아들이 보복 방화했다&amp;amp;amp;rdquo;며, &amp;amp;amp;ldquo;괴산읍은 동학군에게 두 차례 습격을 받아 읍내 5동이 초토화 되었고, 동학군 희생도 컸다&amp;amp;amp;rdquo;고 적었다.주력 동학군이 보은으로 옮겨간 뒤에 관군의 참혹한 보복 학살이 자행된다. 관 기록에 &amp;amp;amp;ldquo;26일 괴산 싸움을 주도한 두령 우현관(禹顯寬) 백창수(白昌洙)를 잡아 처형하고, 10월 11일에는 청안 난매리(蘭梅里)에서 음성 접주 송병권(宋秉權)과 도인 곽영식(郭永植) 부자를 포살하고, 10월26일에는 보은 청안 등지를 순회하다가 접사 안무현(安武玄) 등 4명을 붙잡아 사살했다&amp;amp;amp;rdquo;고 전한다.

필자가 괴산 읍을 찾은 날은 마침 장날이었지만 비안개에 젖어 자못 을씨년스러웠다. 장꾼들과 어울려 청안으로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물안개가 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채길순 소설가 &amp;amp;amp;middot;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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