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학예연구관
예전 같으면 이즈음이 장마철이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무더위가 너무나 일찍 우리에게 다가왔다. 모두가 냉장고 속의 시원한 얼음과 아이스크림 그리고 선풍기와 에어컨 등을 떠 올리는 것은 더위를 이기려는 한 방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조상들은 이러한 무더위를 이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을까? 우리 조상들도 냉장고가 있었을까? 결론적으로 냉장고는 아니지만 냉장고 역할을 하는 '석빙고'가 있었다.
현대인의 생활필수품인 냉장고는 냉기나 얼음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기계장치이지만, 빙고는 겨울에 보관해 두었던 얼음을 봄·여름· 가을까지 녹지 않게 효과적으로 보관하는 냉동 창고이다.우리나라에서 얼음을 보관한 것은『삼국유사』에 신라 유리왕이 얼음 저장창고를 지은 것과『삼국사기』에 신라 지증왕 6년(505년) 11월에 왕이 얼음을 저장하게 한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신라에는 빙고전(氷庫典)이란 관아가 있었다.
고려에서는『고려사』에 3대 정종 때 얼음 배급시기를 음력 4월 입하로 한 기록이, 문종 3년(1049년)에는 법으로 해마다 6월부터 입추까지 얼음을 나누어 준 기록이 보인다.조선 태조는 서울 한강 가에 얼음 창고를 만들었는데, 1396년 둔지산(屯智山) 밑에 서빙고(西氷庫)를 두고 두모포(豆毛浦)에 동빙고를 두었다. 동빙고는 왕실의 제사에 쓰일 얼음을 보관했고, 석빙고는 왕실과 고급관리들의 음식이나 고기 등의 저장용이나 의료용 또는 식용얼음을 공급했다. 조선시대의 빙고는 정식관청이었으며, 얼음의 공급 규정은 경국대전에 엄격히 규정될 만큼 얼음의 공급[頒氷]은 중요한 국가행사였다.
한 겨울의 얼음을 보관했다가 쓰는 기술을 장빙이라고 했다. 여름과 겨울의 차이가 많이 나는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이러한 장빙기술이 크게 발달 하였다. 장빙기술인 석빙고는 현재 7개가 남아 있는데, 남한에 경주, 안동, 영산, 창녕, 청도, 현풍 등 6개가 북한 해주에 1개가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완벽한 것이 바로 경주의 석빙고이다.
보물 66호인 경주 석빙고는 영조 17년(147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입구에서부터 점점 깊어져 창고안의 길이 14m, 너비 6m, 높이 5.4m의 규모이다. 석빙고는 온도 변화가 적은 반 지하 구조로 한쪽이 긴 봉토 고분 모양이며 바깥의 외기를 줄이기 위해 출입구의 동쪽이 담으로 막혀 있고 지붕에 구멍이 뚫려 있는 구조이다. 지붕은 2중구조로 바깥쪽은 단열효과가 높은 진흙으로, 내부쪽은 열전달이 잘되는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천장은 아치형으로 5개의 기둥에 장대석이 걸쳐져 있고 장대석이 걸친 곳에는 밖으로 통하는 환기구멍이 3개가 나 있다. 이 구멍은 아래쪽은 넓고 위는 좁은 직사각형 기둥 모양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바깥에서 바람이 불 때 빙실 안의 공기가 잘 빠져 나오는 것이다. 즉 복사열로 데워진 공기와 출입구에서 들어오는 바깥의 더운 공기가 지붕의 구멍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빙실 아래의 찬 공기가 오래 동안 머물 수 있어 얼음이 적게 녹는 것이다.
또한 지붕에 잔디를 심어 태양 복사열을 차단하였고, 내부 바닥 한가운데는 5도 경사지게 배수로를 파서 얼음에서 녹은 물이 밖으로 흘러 나갈 수 있는 아주 과학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다가 석빙고의 얼음을 왕겨나 짚으로 쌓아 보관했는데, 이것은 왕겨나 짚이 단열효과를 높이기도 하지만, 얼음이 약간 녹으면서 융해열로 주변 열을 흡수하게 되므로 왕겨나 짚의 안쪽이 온도가 낮아져 그만큼 얼음이 장기간 보관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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