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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현장을 찾아(12) - 영동편<영동편> 걸출한 동학 지도자들의 활약ㆍ희생
채길순  |  news@ccdail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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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7.05.27  18: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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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혁명 당시 용산장터자리인 용문중학교. 북접 동학군의 마지막 승리의 전장터인 셈이다.


영동 지역의 동학은 창조 초기에 유입되어 교도 활동이 성했다. 전라 경상 충청 3도를 접한 지역 특성처럼 동학 지도자들이 타 지역으로 진출하여 활약상이 두드러지는데, 청산 옥천 금산 진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
동한 황간 조재벽(趙在壁) 대접주가 그 예다.

동학혁명 이듬해인 을미년 동학난 재판 에 송일회(宋一會) 손해창(孫海昌) 등이 두령 급으로 재판을 받았고, 백학길(白鶴吉) 접주가 보은에서 효수되었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이들이 영동 출신이라는 사실 외에 구체적인 활동은 알 길이 없다.

영동지역 동학혁명 사적으로는 황간 지역 동학교도들이 추풍령을 넘어 김천 등지로 진출하여 맹렬한 활약을 보였다는 기록과, 2차 봉기때 영동 황간 관아 점령이나, 용산장터 싸움을 들 수 있다.



황간은 창도 초기에 동학이 유입되었다 창도주 최제우가 선전관 정운구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 될 때 추풍령 아래에 이르자 &amp;amp;amp;amp;quot;(최제우의) 탄압에 불만을 품은 동학교도들이 모여 있다&amp;amp;amp;amp;quot;는 말을 듣고 보은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기록이 말해주 듯 초기부터 황간 지역에 교도의 활동이 유난했다.

뿐만 아니라 삼정문란으로 민중 봉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던 임진년(1892) 8월에 황간 원민들이 일어나 현아를 습격했다.

조정에서 안핵사를 파견하여 황간 현감 민영후의 탐학 사실이 밝혀져 파직된다. 민란이 동학혁명과 맥을 잇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다.

일찍이 황간 지역은 조재벽 접주가 포교를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1894년 봄에는 옥천 금산 진산 등지에서 활약하고, 9월 기포 이후에는 황간 동학교도들이 김산 상주 등 경상도로 넘어가 활약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 영동ㆍ황간 관아 점령

▲황간 가학루. 마치 학이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 듯 하다 하여 붙여졌다. 양반들의 집회장소로 사용되었다.

공주 전투에서 패한 뒤 남원까지 후퇴했던 북접 동학혁명군이 남원 새목터에서 최시형과 합류, 관 일본군이 추격하는 평야지대를 피해 소백산맥 줄기를 타고 북상하면서 18 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른다.

이들은 장수와 무주 관아를 점령하고, 영동의 관문인 달밭재(월전리)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인다.

이 시기에 상주 소모영장 김석중은 무주와 10여리떨어진 영동 고관리에서 동학 두령 정윤서를 체포하여 포살했는데, 7000여 북접동학혁명군이 밀려온다는 급보를 받고 황급히 철군한다.

김석중은 당시 영동 땅으로 들어와 수많은 동학교도들을 색출하여 포살했는데, 이는 2세 교주 최시형이 이곳에 은둔해 있다는 밀고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체포되어 포살 당한 영동지역 두령 급 인물로는 이판석(李判石西濟村接主), 김철중(金哲中接司) 김태평(金太平) 김고미(金古味) 배안순(裵安順三室村接司) 이관봉(李寬奉) 박추호(朴秋浩) 등이다.

김석중은 뒷날 토벌 공(功)을 인정받아 안동 군수로 부임하지만 이듬 해(1895)에 의병 이강년에게 붙잡혀 농암장터에서 군중들 앞에서 효수된다.

김석중은 급히 상주로 철군하면서 수석리에서 동학 두령 정여진(鄭汝振)을 포살하고 세작을 보내 용산 장터 싸움에 대비한다.

한편, 무주를 떠나 영동으로 들어온 북접동학혁명군은 영동과 황간 관아를 점령한다. 북접동학혁명군은 충청도와 경상도 두 진출 방향을 두고 갈등이 있었지만 상원영차랑(桑原榮次郞)이 지휘하는 낙동병참부에서 일본군이 출동했다는 경상도 길을 포기하고
충청도 보은으로 방향을 잡는다.

북접 동학군은 수석리를 거쳐 용산장터로 들어가 전투를 치른다. 수석리는 보은과 상주로 들어가는 길목인데, 이곳에는 일찍이 경상감사를 지내다 탐학 사실이 밝혀져 유배를 당한 고종의 6촌 형 이용석(이용강)이 귀양을 내려와 살았다.

처음에 경상도 칠곡에서 유배를 살다가 영동 밀골로 거처를 옮겼다가 수석리로 들어왔다. 이용석은 어찌나 포악이 심했던지 갑오년을 전후하여 이 지역 동학도들로부터 수차례 강탈을 당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가 사망했을 때 고종이 왕족 상여를 하사했는데, 상여조차 원민의 공격을 받았다.
현재 당시의 왕족 상여가 용산면 신항리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치열했던 용산 장터싸움

현재 용산시장 입구에 오영근 군수의 선정비가 서 있는데, 이는 갑오년 이후 많은 동학교도를 회유하여 희생을 온몸으로 막은 공 때문이라 한다.

10년 전 답사 때 만난 정태선 옹(작고)의 말에 의하면 보은관아에 정부군이 내려와 있었는데 영동 오영근 군수가 밤낮으로 관아 마당에 엎드려 끌려온 영동 고을 동학교도들을 살려 달라 고 턱 수염에 흰서리가 맺히도록 간청해서 많은 인명을 살려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용산장터 싸움이 벌어진 곳은 현재 용문중학교 자리인데, 병자년 장마 때 장터가 쓸려 내려가 현재 위치로 옮겼다.

▲동학혁명 체험학습의 실례.


당시 용산 장터 싸움 상황은 상주 소모영장 김석중의 &amp;amp;amp;amp;lt;소모일기(召募日記&amp;amp;amp;amp;gt;와 &amp;amp;amp;amp;lt;토비대략(討匪大略)&amp;amp;amp;amp;gt;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1894년 12월 11일 아침, 청주영 군사와 용산 장터에 진을 치고 있던 북접동학혁명군이 먼저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상주 소모영 유격병대 소모장 김석중은 세작을 보내 전투 상황을 보고받고 용산 후곡(後谷)으로 들어가 협공했다.

산 위까지 진을 치고 있던 북접동학혁명군은 상주유격병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깊숙이 공격해 들어오자 반격을 가했다.

북접동학혁명군의 공격이 워낙 조직적이고 막강하여 대열을 흩지 않고 서서히 후퇴했다가 다시 포위 공격하는 전략으로 크게 이긴다.

급기야 다음날(12일) 아침에는 전직 군수 박정빈이 주도하는 옥천의 민보군과 청주병이 다시 공격을 해왔고, 상주 소모영군이 협공하여 북접동학혁명군이 이들을 맞아 싸우느라 주춤해진 틈에 급기야 청주 옥천병이 밤재를 넘어 청산 방면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북접동학혁명군이 이를 계속 추격, 문바위와 한곡리를 거쳐 내처 청산관아까지 점령했고, 김석중이 이끈 상주 유격병대 마저 후퇴하여 일본군과 합세했다.

기록으로 보아서는 용산장터 싸움이 어느 쪽의 승리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피아간 희생이 컸던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다.

북접동학혁명군은 14,15일 이틀간 청산읍내에 머물다 보은 북실로 들어가 참살 당한다.


채길순 소설가 &amp;amp;amp;amp;middot;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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