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김헌섭 사회부장
| 김헌섭 사회부장 |
본격적인 휴가철을 맞았다. 요즘 각 직장이나 술자리에서의 화두는 단연 피서(避暑)다. 고물가 탓인지 예년에 비해 해외여행이 많이 줄었고, '알뜰 피서'가 늘었다. 수년간 지인들과 팀을 이뤄 해외여행을 다녀왔으나, 이번 휴가는 시대적 상황에 맞게 국내로 돌릴 생각이다.
그동안은 국내 물가가 만만찮은 데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는 식으로 극성을 부리는 피서지 바가지를 고려, 조금만 보태면 이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 여러 해 동안 해외여행을 선택했다.
몇 년 전 여름 휴가로 첫 해외 여행길에 올랐을 때 동행한 가족의 상당수가 처가(妻家) 쪽 관계이거나, 노부부의 여행 경비를 부담한 게 딸이라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하지만 이젠 "아들을 둔 부모는 '방콕'하고 딸 가진 부모는 '해외여행'을 다닌다"는 '피서철 단골 멘트'가 지극히 자연스럽다.
남아선호 사상이 뿌리 깊게 박힌 우리나라에서 가당치도 않던 일이 어느덧 생활에서 너무도 당연한, 더 이상 관심조차 끌지 못하는 이야기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며칠 전 태아의 성(性) 감별 고지를 금지한 의료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 1987년 개정 공포된 의료법 조항에는 태아의 성 감별 목적으로 임부를 진찰하거나 검사하지 못하도록 돼 있고 태아의 성을 임부, 임부의 가족, 다른 사람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고 있다.
태아 성 감별이 남아선호 사상과 결부돼 무분별한 인공 임신중절 등 비인도적 의료 행위로 이어지는 등 부작용이 컸기 때문이다. 1994년 개정된 의료법에는 의료인이 성 감별 금지 규정을 위반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처벌 규정이 더해졌다. 금지 이후에도 성감별이 성행하자 처벌 규정이 생겼고, 이 법에 저촉된 의사들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하면서 논란이 돼 왔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지면서 성 감별과 관련한 논란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의료계가 '환영'하면서도 종교계나 윤리학계의 반발을 우려한 듯 신중하다.
의료계는 남아선호가 상당히 불식됐고, 일정 기간 이후에는 태아의 성을 고지할 필요가 있다는 점 등에서 목적이나 기간 제한 없는 태아 성 감별과 고지 행위 금지가 부당하다고 주장해 왔다.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성 감별을 낙태의 원인 제공으로 보는 것은 소매치기 당한 사람에게 물건을 들고 나온 죄를 묻는 것과 같다'는 비유까지 했다. 이에 대해 생명윤리학자들은 낙태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성 감별이 이뤄지면 임신 중절이 가능한 현행 법 조항이 제대로 지켜지겠느냐는 것이다.
뿌리 깊은 남아선호 사상이 잔존해 있는 현실에서 성 감별이 자칫 과거와 같은 성비 불균형 등의 문제를 다시 만들 수도 있다는 주장도 펴는 등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스갯소리로 들리던 '피서철 단골 멘트'가 우리의 실생활이 된 게 이미 오래 전 일이고, 아들 선호도가 크게 낮아진 것도 사실인 요즘 성 감별이 낙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은 '해묵은 등식(等式)'에 불과한 것 같다.
성 감별이 성비 불균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마디로 기우(杞憂)다. 남존여비(男尊女卑)나 남아선호(男兒選好)라는 단어를 접해본 지가 언제인지도 모를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다.
생명 보호가 알권리보다 훨씬 소중하다는 국민들의 의식도 높아졌다. 적어도 원하는 성별이 아니라고 해서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단정할 순 없어도,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논란이 14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불임부부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아이를 간절히 원해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는 그들에겐 성 감별이 이 세상에서 가장 호사스런 '사치(奢侈)'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