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결에 스며든 '시간' 과거·현재·미래를 잇다

과학이론 바탕 시각·청각·후각 이용해 실체 재구성
서양화 '양감'·동양화 '깊이' 조화…4차원 세계 실현
작품에 기억·인식 덧칠…독특함으로 세계화단 노크



과학적 이론과 시간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화가가 있다. 인간의 두뇌에 축적된 것들을 정보와기억, 시간 등으로 나열하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끄집어낸다. 거기에는 반드시 인간의 오감(五感)에 앞서 과학적 논거가 바탕이 되곤 한다.

동양화가 이창수(35)는 '시간'이라는 화두를 화면에 담겠다는 맹랑(?)한 꿈을 꾼다. 그는 미술을 단순히 외양을 객관적으로 묘사해 내는 것으로 바라보지 않는데 그가 보여주는 재현방식은 아주 독특하다. 자신이 어떤 대상을 화면에 묘사하는 순간에도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

붓을 더해가는 순간마다 흘러간 시간은 언제나 새롭게 변모한 것들의 묘사를 시도한다. 사람의 기억(정보)은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에서 출발하지만 그의 작품은 언제나 완벽에 가깝다.

거실 벽면을 모두 차지할 정도의 대형합판 위에 그려낸 나무 그림은 한국화풍이 가장 잘 묘사된 작품이다. 이 그림의 화면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그 위에 흩뿌리고 바른 투명 수지(물본드의 일종).

하지만 보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화면을 들여다보면 나무윤곽을 따라 하나하나 선을 새겨 넣고 그 위에 물감을 뿌린 다음 다시 갈아낸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이창수는 나무를 공간을 점유하는 하나의 실체로 바라본다. 싹을 틔우고 성장하기까지 맺어온 온갖 환경들을 통해나무는 그 시간의 축적물이 되기 때문이다.

'파동찾기' 시리즈는 더욱 충격적이다. 얼핏 보기에는 추상적 이미지가 강한 그것들을 한참 들여다보면 생선과 물체 등의 뚜렷한 형상이 나타난다. 고등어라는 생물을 표현하기 위해 물감으로 밑작업을 이뤄낸다.

물은 파동으로, 열은 복사분자로, 빛은 복사와 파동의 결합으로 인간에게 전달되는데 작가는 이같은 원초적 과학논리를 찾아내 화폭 속에 밀도있게 담아낸다. 다시 말해 고등어나 배추이파리 등 인간의 뇌 속에 저장된 일련의 정보들을 작가는 다양한 물감을 밑작업으로 끌어내 얽히고설킨 그것들을 형상화한다.

▲ 맨위부터 이창수 작가 파동찾기 시리즈 中 '배추',파동찾기 시리즈 中 작품 '고등어',조각칼로 일일이 새긴 다음 물감을 칠하고 그것을 다시 깎아낸 상감기법의 '산수도'.
이창수에게 시간의 존재는 착시현상으로도 이어진다. 나무판 위에 피망이나 고추를 그렸는데 여기에 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먹빛에 가까운 어둠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도 물체는 어떤 색채보다도 뚜렷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관람객들에게 물감과 기타재료의 전달속도차를 이용한 것으로 속도, 즉 시간을 표현한다.

이창수가 최근 시도하는 것은 동서양의 기법을 교묘하게 하나로 묶는 작업. 서양화는 양감표현을 중시하는 반면 동양화는 그림자가 없는 사물만을 묘사해 본질에 대한 깊이를 중시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화병 시리즈'는 명암을 준 꽃병과 그 속에 담겨진 매화가지 등을 통해 3차원적 화병과 2차원적 꽃의 조화를 이뤄낸다.

작가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화병을 비스듬히 쓰러뜨려 지구의 중력을 표현, 4차원으로 세계로 나아간다.

후각에 의한 사물의 환기 또한 그에게는 과거와 현재를 단절이 아닌 연속적 관계로 이해하는 방식중 하나가 된다. 어떤 냄새가 후각을 통해 감지되면 , "사물을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사물이 가까이 있음을 느낀다.

눈을 감고 냄새를 맡는 순간 그 사물은 현실이 되는 것이다."냄새를 통해 이미 인지하고 있는 사물을 기억해내는 일은 과거의 것을 현실로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것 역시 과거의 것이 된 사물의 정보를 일정 시간이 경과한 이후 새로운 정보를 결합해 이해한다는 말이다.

'향수' 시리즈는 당시 그림의 소재가 된 재료의 엑기스를 뽑아내 밀봉한 다음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어낸 것들이다. 나무의 소재가 됐던 소나무 진액이나 고등어의 비린내를 뽑아내 진공포장한 다음 하나의 오브제로 사용, 시각적인 그림을 후각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이다.

눈에 익은 동물이나 식물을 소재로 한 그림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결코 눈에 보이는 재현에 그치지 않는 것이다.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어떤 사물이 작가의 눈에 들어왔을 때(혹은 작가가 어떤 사물을 한 공간에 놓았을 때), 그 공간을 그저 빈 공간이 아니라 이제까지 흘러간 시간이 축적된 공간이며, 따라서 그 시간 동안 생겨난 크고 작은 온갖 사건들, 그리고 그 공간에 머물렀던 모든 존재들의 흔적이 잔존하는 공간이다.

그렇게 새롭게 그 공간을 점유한 사물은 그 흔적(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어떤 기(氣)와 같은 에너지)과 교섭하며 다시 관계를 형성한다. 화면에 재현된 소재를 둘러싼 크고 작은 붓자국들은 바로 이러한 그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선비들이 산수를 유람하는 모습을 재구성해 현대식으로 표현해 과거와 현재, 미래와의 결합을 추구한다. 현대식 산수도인 '고사관수도'는 녹색과 주황 등 원색을 이용해 산수를 표현, 동양화의 강함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그림 속 외투를 입은 남자는 과거 갓끈에 도포자락 휘날리는 오늘날 선비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 물감을 계속적으로 덧칠해 마치 작업의 시간을 시각적,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작업도 시도한다. 물론 아직은 실험단계이기도 하지만 시각과 청각, 후각을 넘어서 입체성으로 다가서기 위함이다.

현재의 존재가 지난 시간의 축적이며, 따라서 미래에는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된다는 것, 어떤 사물에 대한 기억 혹은 인식은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 바로 이창수 생각이다.

그가 작업을 통해 보여주는 일정 정도의 회화적 성취에서 일탈하여 지속적으로 또 다른 표현방식을 찾고 있는 이유며, 보는 이 역시 재현된 사물의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불편함'과 '불안함'의 원인을 찾아 그림을 이리저리 읽게 하는 것, 세계화단을 향한 발걸음이라할 수 있다. /글=이성아기자·사진=노수봉기자

작가약력

▲1973년 서울생 ▲목원대 회화과 및 동 대학원 미술학과 졸업 ▲이창수 개인전(대전 대학로 21c 갤러리, 2001)'7가지 시간 찾는 방법'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갤러리, 2008) '中區 에서 難防'(대전 현대갤러리, 2008) 등 개인전 ▲시간의 은유전(이탈리아 베르가모아르스메디아 갤러리, 2000) kunst aus korea-2002 한국현대미술 독일 라인란드주지사초대전(2002) 파리탐사보고전-느리게2(대전충남대박물관, 2003) 제23회 재불청년작가전(파리문화원, 2006) 이면접촉 2인전(파주 헤이리 공 갤러리, 2007) 재불청년작가와 뉴욕작가전(2007)등 그룹전 ▲청주시창작스튜디오 제1기작가(2007) ▲한국 미협·재불청년 작가회원 ▲현 청주하이브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갇목원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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