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와 동행한 30년 도예 인생… 흙에서 느껴지는 '손맛' 일품

 

[충청일보 정현아기자] '1만 시간의 법칙'. 하루 3시간, 1주일에 20시간씩 모두 10년 동안 빠짐없이 노력한 시간의 개념이다. 이 법칙을 통해 우뚝 일어선 사람들을 전문가라고 한다. 전문가 중에 최고들만이 오를 수 있다는 경지가 바로 '명인(名人)'의 반열이다. 1만 시간이 아닌 '10만 시간 법칙'에 순응한 이들을 말한다. 충청일보는 앞으로 매주 금요일자에 충청지역에서 활약하는 각 분야의 명인들을 소개한다.  


 '기다림'. 그의 작업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작업을 준비하는 과정이나 진행 중인 상황에서도 적절한 기다림이 있어야 하고 가마문을 열고 닫고. 다시 여는 순간순간도 고뇌의 기다림이 있어야 한다.

손끝으로 새생명을 피워내는 작업이니 그리움과 기다림, 인고(忍苦)의 세월을 거쳐야 하는 수 밖에 없다.
 

 완벽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왔다는 도예가 '토지(土地)' 김기종씨(51).
 

 월세 5만원짜리 허름한 창고에서 시작된 '도예 명인' 인생이 지금은 고즈넉한 시골 풍경을 그대로 품고 있는 갤러리와 작업실까지 갖출 정도로 성장했다.

지난 8월 21일 30년 가까이 물레를 돌리고 가마와 함께 한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딱히 대문이랄 것도 없는 그의 작업실 입구에 들어서면 '토지(土地)'라는 커다란 나무간판과 순박한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
 

 갤러리 내에는 소박한 찻잔, 그릇과 함께 화려한 조형작품과 다기세트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83학번인 김씨는 청주대학교에서 공예(도예)를 전공했다.
 

 학창 시절에는 사생 대회 입상과 교내 합창 대회 활동으로 스스로 예능적인 '끼'가 다분하다고 생각한 김씨는 일찌감치 미술분야로 진로를 정했다.
 

 물론 미래가 불확실한 예술분야를 선택한 아들을 우려하는 부모의 반대도 있었지만 치열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김씨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대학 1학년 시절은 교양과목 수업 위주인때라 물레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그저 눈치껏 물레를 차지한 선배들의 어깨 너머로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1인당 1대씩 물레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선배들 조차도 조를 짜서 물레를 쓰는 상황이었어요. 1학년생이 물레를 만지려면 선배들의 뒷작업을 돕다가 선배들이 가고나면 감춰둔 흙으로 연습하고 연습한 흔적을 언제 그랬냐는듯 지워야 했어요."
 

 이 때부터 그는 '나중에 돈을 벌면 꼭 맘껏 작업할 수 있는 작업실을 마련하겠다'고 다짐했다. 도자, 목칠, 금속, 염직 등 다양한 공예를 만질 수 있었던 그가 도예를 선택한 것은 흙에서 느껴지는 '손맛'이었다.
 

 차가운 금속공예, 톱밥 날리는 목공예보다는 손에 착 달라붙는 흙을 매만지며 나만의 세계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 큰 매력이었다. 대학교에 들어와 처음 접한 공예는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도예를 공부하며 생긴 크고 작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느라 몇 날 몇 일 잠을 설쳐가며 작업에 매달리기도 했다.
 

 "처음 만든 도자기 바닥이 'S'자로 쩍 갈라졌어요. 선배들에게 물어보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만 그 때는 혼자서 꼭 풀어내겠다는 고집이 있었어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두꺼운 바닥굽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아냈죠."
 

 지난 1991년 제대 후 군생활로 인해 무뎌진 손의 감각을 찾을 무렵, '호랑이 교수'를 만나면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하게 된다.

대학원에 복학하자마자 정담순 담당 교수가 여러 학부생이 있는 곳에서 물레 시연을 요구했고, 새까만 후배들 앞에서 진땀을 빼는 망신을 당했다.


 시련은 계속됐다. 일주일 안에 접시 500개를 만드는 과제를 낸 것. 비좁은 작업실에 접시를 놓을 공간도 없지만 결국 600개를 만들어냈다.


 기쁜 마음으로 교수님을 기다렸지만 "네 눈에는 이게 접시로 보이냐? 다시 만들어"라는 불호령에 그는 처음으로 도자기를 포기하고 싶었다.


 "논문 준비 중에도 논문 작품 시안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너 도자기 그만 둬'라고  면박을 줬을 때도 도자기를 그만 두고 싶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 어려운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를 시험해 보신 것 같아요."
 

 몸과 마음 고생이 심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더욱 냉혹하게 담금질했다. 그렇게 도예가로 성장한 김씨는 '도예 명인'으로 입지를 굳혔다.
 

 충북 유일의 도예 명인인 그는 지난해 시사투데이에서 주최·주관한   '올해의 존경받는 인물' 문화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지난 2008년 지식경제부장관 표창도 받았다. 개인전도 벌써 10차례 열었다.
 

 제자들도 키우고 있다. 1994년부터 우송공업대, 청주대, 상명대, 공군사관학교, 협성대 대학원, 영동대, 여주대 겸임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18년 출강했던 여주대에 나갈 수 없게 됐다.
 

도예학과가 폐과가 된 것이다.
 

제자들을 가르쳤던 교수로서 김씨는 가슴 아픈일이 많다고 했다.
 

 "전국적으로 예술 관련 학과나 도예과가 하나 둘씩 폐과되고 있고 젊은이들 자체도 자신의 끼와 재능을 펼쳐보기도 전에 희망적 꿈을 접어야하는 현실에 부딪히고 있어요. 향후 10년 후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맥이 끊기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귀한 자원들이 지역에서 떠나지 않도록 지역 작가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정책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김씨의 한숨 속에서 도예 명인으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 "토지(土地) 공방 임직원 인사드립니다"

 김기종 도예가는 유쾌한 '꽃중년' 그 자체였다.

작업장의 모습을 소개하겠다며 안내한 작업실에서는 뜻밖의 '토지를 이끌어 가는 임직원들'과의 대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15명의 임직원들은 따뜻한 물로 단체 사우나를 마친 깔끔한 모습이었다.


 '나무칼 국장'을 비롯해 '굽칼 과장' '전칼 계장' '곰방대 7급' '스폰지 6급' '비정규직 방망이'까지 다소곳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작업장의 터줏대감 '큰가마 총리' '토련기 장관' '손물레 차관' 개도 주요 임무에 따라 직급이 차등 부여됐다. 김 도예가 자신은 '회장 겸 토지교주'로 지칭했다.
 

 따뜻한 손길로 그 동안 수고한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던 김 회장은 "매년 열심히 노력해 준 직원들에게 단 하루의 휴가조차 허락하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며 "앞으로도 부지런히 토지를 위해 일하자"고 너스레를 떨었다.


작업장 내 소품, 도구 하나하나에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순간이었다.

직원 소개가 마무리 될 무렵 공방을 찾은 단골 손님이 있었다.

1000여점 가량의 작품이 전시된 갤러리로 손님을 안내한 그는 자연스레 주방으로 들어가 다기잔에 차를 내왔다.

심오한 작품 소개보다는 소소한 농담 주고받기와 특유의 넉살을 부리는 모습에서 그의 작품에 해학과 유머가 배어 나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제자인 딸내미 실수로 졸지에 '아빠'가 별명으로

'도예 명인'의 삶 뿐 아니라 18년 간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김기종씨는 그림을 전공하는 딸 현아씨(24)와 관련된 웃음기 가득한 에피소드를 털어놨다.

지난 2010년 대학수시를 지원했던 현아씨가 충북 영동대학교에 붙었다.

그 학교에는 김씨의 대학시절 유일하게 'A+' 학점을 준 성낙양 교수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성 교수에 대한 믿음(?)으로 딸을 영동대에 안심하고 보내기로 한 김씨에게 일주일 후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성 교수였다. "딸만 보낼게 아니라 김 회장도 우리학교 학생들 좀 지도해주세요."


 그 후로 영동대 교수가 된 김씨는 딸과 "절대 학교에서는 아는 척 하지 말 것"을 약속했다.


 청주대, 상명대, 여주대 등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쳐 온 베테랑 교수지만 딸이 앉아있는 강의실로 향하며 바짝 긴장했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김씨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딸을 보니 긴장을 안할 수가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2학년이 됐을 무렵, 무의식 중에 튀어나온 "아빠"라는 소리에 친구들은 "김 교수님이 너희 아빠면 총장님은 우리 아빠다"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현아 선배는 왜 김 교수님을 아빠라고 부르세요"라는 1학년 후배들의 물음에 딸내미는 "너희 몰랐구나. 김 교수님 닉네임이 아빠야. 아빠라고 부르면 얼마나 좋아하시는데…"라고 답변했다.

그 후부터 '아빠'라는 별명을 얻은 김 교수는 "재치있는 딸 덕분에 새별명도 생기고 강의도 즐겁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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