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광섭칼럼

"옷은 걸어 다니는 광고판입니다. 내게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자연환경 하나하나가 소중한 작품의 소재이자 상품입니다.
이것들을 세계 곳곳에 알리는 것을 통해 먹고 삽니다" 패션디자이너 이상봉 씨를 만났을 때 그가 던진 화두에 놀라움과 함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아닌, 그의 삶과 문화·철학과 가치를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아니, 운 좋게 아이템 하나로 언론에 주목받으면서 일약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가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금이나마 가져 본 나 자신이 가소롭기까지 했다.
한글의 과학적인 우수성을 디자인으로 새롭게 선보이게 하고, 늘 푸른 소나무의 싱그러운 사계를 패션과 접목시키며, 자개 또는 자수와 같은 전통문화를 새로운 컬러와 디자인으로 상품화 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온 그에게 한국은 그 자체가 작품이자 거대한 보물 창고였던 것이다.
발 닿는 곳마다, 눈에 띄는 것마다, 그리고 마주하는 사물 하나하나가 소중한 삶과 문화의 플랫폼인 것이다.
그가 최근에 청주지역의 '땀&땀'이라는 아줌마 동아리에 매료된 것도 흥미롭다. '땀&땀'은 표현 그대로 한 땀·한 땀 정성을 가득 모아 바느질을 하고 이를 조각보와 같은 문화상품을 만드는 아줌마들의 모임을 일컫는다.
이들의 작품이 서울 인사동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는데 작가는 창작 아이템을 얻기 위해 인사동을 찾았고 그때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땀&땀' 작품을 구입하게 되었다. 작가는 불현듯 옛 생각에 젖었다.
누이는 어머니 곁에서 밤이면 밤마다 수를 놓았다. 호롱불을 가운데 두고 섬섬옥수 고운 손길로 한 땀·한 땀 정성과 사랑을 심었다. 그러기를 며칠 계속하면 베갯잇에 알록달록한 한 마리 학이 날고 목단꽃이 피어났다. 어느 때는 여러 개의 조각보가 모여져 책보나 괴나리봇짐이 되기도 했고 누이가 나들이 할 때 사용하는 고운 보자기(면사보)가 되기도 했다.
밖에 나가 친구들과 거칠게 논 다음에는 항상 무릎이나 팔꿈치에 큰 구멍이 나고 찢어지게 마련인데 그 때마다 어머니는 예쁜 천을 대고 바느질을 하셨고 오롯하게 새 옷이 되곤 했다. 그 때 만난 한국의 오방색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것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너무 아름다워 꿈결에서도 줄곧 나타나던 곱디고운 누이의 얼굴을 닮았다.
세상 곳곳을 다녀봐도 그만한 색상과 그만한 감동을 주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토록 꿈결 같기만 하던 오방색이 한국의 여인네 손길을 만나면서 조각보라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태어났으니 작가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소재가 어디 있겠는가.
조각보야말로 실용미학의 정점이자 다양한 삶의 형태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각보야말로 어머니의 사랑이자 디자인이며 예술인 것이다.
작가는 조각보를 테마로 한 패션디자인에 몰입하고 있다. 파리와 런던, 그리고 뉴욕 등 세계의 주요도시에서 조각보를 활용한 다양한 상품을 선보이는 전시회와 패션쇼를 기획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한글을 비롯한 우리의 다양한 활자를 이용한 상품도 기획하고 있다. 이참에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를 세계적인 문화상품, 세계인이 애용하는 명품으로 문화상품화 하는 방안도 고민하면 좋겠다.
이처럼 한국인의 문화와 한국인의 삶이 누군가의 느낌과 열정을 만나면 새로운 문화콘텐츠가 되고 브랜드 파워가 된다.
느낌이라는 것은 내면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침잠하는 것이고, 열정은 그 느낌을 새롭고 창의적인 아이템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힘을 일컫는다.
여기에 디자인 감각이 첨가되면 최고의 상품으로 인정받는다. 우리는 이것을 하이터치문화라고 부른다.
전통적이지만 혁신적인 가치를 만들려고 하는 노력, 긴장감과 새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예리한 감수성이 곳곳에 묻어있는 상품을 만들려는 열정이 필요한 것이다.
국적불명의 디자인이나 족보도 없는 상품을 만들려고 하는 노예의식에서 벗어나 우리의 신화와 전설,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정신적 가치를 표현하려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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