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길 따라 애잔한 향수에 젖다

목탄·면봉 이용한 명료한 흑백대비로 '고향' 그려
인위적 이미지 線으로 압축…정신·감정 정화 추구



현대인들에게 시골은 고향이다. 늘 돌아가고 싶은 곳이지만 그렇지 못한 곳, 그래서 더욱 애절한 대상이다.

현대인들에게 고향은 여유로운 삶이다. 길은 좁고 산은 깊다. 구불구불 이어진 다랑논은 층층으로 쌓인다. 최소한의 것만을 소유한 채 욕심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이 그 속에 있다.

동양화가 박영학(36)은 시골풍경을 검빛으로만 그린다. 수묵화에서 발생하는 발묵이나 파묵효과를 모필 대신 목탄과 면봉에서 찾는다.

그는 '방해말'이라는 고운 돌가루를 장지 위에 열 번 하도고 한번을 덧칠해 표면처리한다. 돌가루가 켜켜히 쌓인 두툼한 소지가 만들어지고 그 소지는 목탄을 또다시 거칠게 분쇄시킨다. 목탄의 굵은 선을 면봉으로 문질러 소지에 밀착시키고 난 뒤 거기서 발생한 목탄분말은 선 주변을 맴돌며 마치 먹줄을 튕겨놓은 것처럼 또 다른 선의 파생을 만들어낸다.


명료한 흑백의 대비, 바로 박영학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일정한 규율을 가지는 형태의 선은 숲과 조합돼 하나의 산수경이 완성된다.

그 선은 방해말의 하얀 여백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논밭, 집, 수로, 길, 저수지, 석축 따위의 인위적으로 형성된 풍경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인위적인 이미지는 그 세부적인 설명이나 묘사를 과감히 생략한 채 단지 굵직한 선으로 남는다.

목탄은 일체의 외적인 물질과의 혼합이 없는 완전한 검은색이다. 그 빛에 극렬히 대응하는 새하얀 빛깔은 수묵화의 여백과 다른 정서를 내포한다. 목탄의 검은 빛과 그 빛에 의해서만 발현하는 그 새하얀 빛깔이 보는 이들에게 숯의 기능처럼 정화된 풍광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박영학은 일정한 형태로 선을 굵게 긋는다. 분명 수묵화의 선과는 명백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 선은 하얀 여백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논밭, 수로, 길, 저수,지 석축 따위의 인위적으로 형성된 풍경은 선 하나로 압축된다.

이같은 인위적 풍경, 즉 논밭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숲과 나무가 적은 부분을 차지하면 화면은 비표현적인 여백이 차지하는 부분이 그만큼 커진다.

인위적 풍경을 여백을 두는 풍경은 확실히 새로운 시각적인 체험을 유도한다. 얼핏 설경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들은 하지만 수묵산수화의 설경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그가 표현한 여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각적 긴장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하다. 흑백 강렬한 대비와 조화라는 형식논리를 통해 유도되는 사유는 하얗게 비워둔 여백에서 단서를 찾는다. 그 여백은 아무것도 없는 절대공간이 아닌, 정신 및 감정이 머물 수 있는 근거지가 된다. 무엇이든 하얗게 표백될 것만 같은 절대적인 정적, 또는 정결의 정서가 자리한다.

검빛의 숲과 나무는 물론이거니와 명료한 선들에 의해 구획되는 새하얀 빛깔은 정신 및 감정을 정화시킨다. 일순간 숨조차 멎게 만드는 그 눈부신 빛깔은 오직 목탄의 검빛에 의해서만 그 존재를 드러낼 뿐이다.

목탄은 일체 외적인 물질과의 혼합이 없는 완전 순결한 검은 빛이다. 그 빛에 극렬히 대응하는 새햐얀 빛깔은 확실히 수묵화의 여백과 다른 정서를 내포한다.

박영학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그들이 만들어놓은 최소한의 문명과 흔적이 있을 뿐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집도 나타나지 않는다. 수많은 그림 중 한두 작품에 한두채가 지붕을 겨우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사람이나 집을 욕심과 이기(利己)의 표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추구하는 세계가 시골풍경인만큼 작품 속에서 그 욕망과 이기심을 몰아내고자 한 의도가 역력하다.


여기에다 면봉으로 비벼 명암을 준 숲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목탄을 덧칠해 기본적 명암을 부여한 다음 면봉으로 얼마만큼 문지르느냐에 따라 작품은 부드러움과 깊이를 더한다.


목탄의 검빛은 숯의 공기정화 기능처럼 사람들의 정신과 감정까지 맑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어쩌면 컬러의 남용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모든 색깔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검정을 통해 시각적 혼란 상태를 치유한다.

목탄이라는 재료, 그에 적합한 표현방법을 찾아 새로운 것으로의 체험을 유도하는 것, 바로 박영학의 사회적 책임이다. /글=이성아기자·사진=노수봉기자

스피드인터뷰


작업실에서 만난 박영학은 창백한 모습이었다. 아침부터 체증이 어찌나 심했던지 얼굴이 백짓장처럼 새햐얗다. 마치 그가 장지 위에 뿌려놓은 방해말의 순백가루처럼 말이다.

-작업과정이 궁금하다.
"수시로 산이나 들로 나간다. 해남이나 제천, 괴산 등지로 나가면 아직까지도 우리 가슴 속의 유토피아가 남아있다. 사진을 찍어와 에스킷을 한다. 그 다음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다.물론 작업의 시작은 장지에 돌가루인 방해말을 입혀가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나라 산과 들, 길은 곡선의 미다. 하지만 그림 속 선들은 날카로운 느낌이다. 왜 다른가.
"목탄이라는 재료가 갖는 특징일 것이다. 목탄은 먹처럼 부드러운 맛을 주지 않는다. 거기에다 굵직한 선으로 압축하는 생략기법을 사용하다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작업을 할 때 징크스가 있나.
"장지와 방해말을 덧바르는 과정에서 합판이 휠 때가 있다. 그러면 정말 작업하기 싫어진다. 어쩔 수 없이 합판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새로 구사하고 있는 작업이 있다면.
"지금까지는 시골풍경을 그렸다. 앞으로는 실내풍경, 즉 가정 안에서 이뤄지는 것들을 목탄과 색깔을 결합시켜 표현해 볼 생각이다. 시기는 내년 5월 이후가 될 것 같다./이성아기자

작가약력

▲1972년 청주 생 ▲증평 형석고·청주대학교·동대학원 졸업 ▲自然, 무한한 체험의 場(청주우암갤러리,2001)·스스로 그러함(청주예술의전당, 2002)·가는 길(서울 갤러리가이아, 2003)·검빛 스밈(서울 토포하우스, 2005)·보아가는 풍경(청주 신미술관, 2006)·immerge yourself into the scenery(서울 인사아트센터, 2007)·immerge yourself into the scenery(서울 한전프라자갤러리, 2008) 등 개인전 ▲art-expo las vegas, mandalay bay convention center(미국 라스베가스, 2007)·st-art, parc des exposotoins de strasbourg(프랑스 스트라스부르, 2007)·art karlsruhe, messe karlsruhe(독일 karlsruhe, 2008)·europ' art geneva, palexpo(스위스 geneva, 2008) 등 그룹전 다수 ▲청주대·청주교육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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