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으로 빚어낸 자연의 숨결 … 삶과 호흡하다

아침 햇살이 솔숲 사이로 찾아든다. 솔숲 아래 크고 작은 나뭇잎들이 황홀하게 햇살을 받고 하늘은 의연히 솟은 아침산을 바라본다. 이른 새벽, 어디선가 꾀꼴새 우는 소리와 개골산의 바람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늘 그렇듯이 오늘도 티 없이 맑은 대자연의 싱그러움 앞에 겸손해지기 위해 하늘을 향해 마음속의 시린 상처를 토해낸다. 그리고 바로 그 빈자리에 싱싱한 햇살을 한아름 집어삼킨다. 뒷산 솔숲 사이로 솟아오르는 태양과 그 태양의 햇살은 찬연하다 못해 너무 눈부셔 눈을 뜰 수 없다.

젊은 도예가 이은범(40)씨는 이렇게 하루를 시작한다. 눈이 오는 모습, 바람이 부는 모습, 그리고 꽃이 피고 지며 녹음과 낙엽이 수없이 반복되는 자연의 신비로움과 함께 불혹의 세월을 보냈다. 충북 음성군 음성읍 석인1리. 개골산이라고 불리는 소나무숲 야산이 마을을 감싸안고 있다. 오직 마을 입구에 충북선 철로가 있어 이따금씩 들리는 기적소리만이 세월의 덧없음을 알려줄 뿐이다.

▲ 이은범씨 공방 내부.


고향 마을 끝자락에 공방 짓고 작업 몰두

작가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산을 바라보고, 철길을 바라보고, 나무와 달을 바라보고, 노을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과 젊은 날을 보냈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 서울로 상경해 몇 해를 보낸 것을 제외하면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 온 것이다.

아니, 서울에서 학교 다닐때도 단 한순간 고향의 아련한 추억과 향기로움을 잊은 적 없다. 솔숲 사이로 빛나는 햇살처럼 늘 푸른 사람이 되겠노라 수없이 다짐하고 맹세했다.

작가가 고향땅에서 온전한 자연인으로, 도공으로 자리잡은 것은 지난 2001년이었다. 홍익대학교 도예과를 졸업하고 부곡도방에서 청자 빚는 기술을 배운 뒤 동학인 김우연씨와 결혼을 하면서 제대로 된 공방을 차리고 싶었다.

마침 부인 김씨도 홍대와 이와여대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했으니 부부가 함께 흙을 빚고 사랑을 빚으며 평생을 살면 좋겠다는 맹세도 있었다.

작가의 결의는 마을 끝자락에 공방을 짓는 것을 시작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장작가마와 가스가마를 차례로 들여놓고 30여평 크기의 작업장을 만들었다.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도 거들어 주었다. 코흘리개가 도공이 되어 돌아왔다는 소식에 주민들 모두 들떠 있었던 것이다.

1년여 간의 준비 끝에 공방이 완성되었다. 제대로 된, 멋지고 훌륭한 도자기를 빚기만 하면 되었다. 작가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누구이며, 왜 도공의 길을 선택했는가. 나는 이 땅의, 세상의 그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을 남기고 보여주며 무엇으로 기록될 것인갉.

작가는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도자기를 빚지 말고 자연과 함께 해 온 자신의 마음, 세상 사람들의 삶을 빚자고 다짐했다.



깊고 느림의 생활미학을 표현

작가는 청자와 백자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휘영청 보름달을 빼닮은 달항아리의 그윽함, 고급스럽고 에스닉한 분위기의 백자 식기세트, 그리고 소나무의 사계(四季)와 드높은 하늘의 푸른 마음을 표현한 청자 식기세트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색상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재주를 갖고 있다.

게다가 작가의 마음속 깊은 심연의 그곳에 있는 온기가 손끝의 기예를 만나면서 한결 멋스럽고 포근한 작품으로 탄생된다.

그래서 작가는 똑같은 음식을 담아도 어떤 식기에 담느냐에 따라 멋과 맛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백자에서는 간결 소탈하면서도 따뜻한 감동이, 청자에서는 자연의 숨결과 아침햇살을 듬뿍 담은 산뜻함이 돋보인다고 강조한다.

젊은 작가가 어떻게 청자와 백자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을까. 첫째는 자신만의 재료를 만들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고, 둘째는 옛것을 따르되 작가의 독자적인 선과 느낌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며, 셋째는 이것들이 가마 속에서 불꽃과 사투하는 과정을 테크니컬하게 조절할 수 있는 재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장작가마에서 초벌과 재벌의 과정을 거칠 때 소나무 재를 작품에 더 많이 묻게 함으로써 수더분한 맛을 내게 한다든지, 한 가지 흙만 쓰지 않고 자체 개발한 흙을 사용하고 자연에서 채취한 염료로 유약을 만들어 쓰는 등 자신만의 노하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막 구워낸 백자나 청자지만 사람들과 함께 인고의 세월을 순결하게 지켜 온 것 같은 맛도 느낄 수 있다.


청자로 다양한 조형물 만들고 싶어

작가 개인적으로는 백자보다 청자의 멋스러움에 더 매료돼 있다. 비취색만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청자색을 표현할 수 있으며 그럴 때마다 신비로움에 가슴이 떨리고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취색 이외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도자세계에 대한 반란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대학시절에 옛 도요지에서 만난 청자 파편은 색감이 다채롭고 고급스럽기까지 했는데 지금도 그 느낌, 그 감동을 잊을 수 없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이같은 노력과 열정의 결과인가. 고급 식기장만 전시 판매하는 서울 청담동의 '정소영식기장' 갤러리에서는 몇 해 전부터 작가의 작품을 취급하기 시작했고, 강남의 감각있는 주부들에게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젊은작가의 독창적인 감각과 야문 손끝이 빚어낸 작품에서 소박한 즐거움을 발견하고, 세월의 농익은 멋과 맛을 느낄 수 있으며, 삶의 그윽함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작가는 청자를 이용해 조형물을 만들고 싶어한다. 청자라는 오래된 언어에 생명력 넘치는 새로운 존재감을 부여하고, 시대정신을 담고 싶은 것이다.

이 나라 방방곡곡에 상처없는 소나무는 없다. 추운 겨울, 매서운 바람, 그리고 인고의 세월을 이겨낸 상흔이 온 몸에 아프게 새겨 있는 것이다. 작가는 상처입은 소나무처럼 고단하지만 꿋꿋하게 이 땅의 도공으로 남을 것이다. /변광섭 객원논설위원(청주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

[작가약력]
▲1968년 충북 음성 출생 ▲홍익대학교 도예과 졸업 ▲동아문화센터 조교 ▲제1회 관악미술대전 입선(1995), 경기도자엑스포 생활도자전 우수상(1999) ▲근현대작가 8인전(2001·일본 마치코), 음식이 있는 그릇 이야기전(2001·서울 갤러리sun), 우리 도자의 모습전(2001·영은미술관), 우리그릇전(2002·세라믹아트갤러리), 충북공예-열정에 호흡하다전(2008·한국공예관) ▲現 음성 석인리에서 도예공방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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