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산외초 교장·수필가)
대구광역시를 떠나 합천으로 달리는데 멀리 기묘한 모습을 한 바위 산맥이 일렁인다. 해발 1430미터의 가야산 정상인가보다. 그 중턱에 해인사가 자리하기에 설렘을 안고 속도를 낸다. 대구에 결혼식이 있어 내려갔다가 한 번 더 가보기로 한 결정이 올 한해를 보내면서 최고의 값진 선물로 남게 되었다. 해인사를 향해 정신없이 오르는데 실로 잘 생긴 소나무가 빼곡히 자리하고 믿음직한 바위가 주인된 홍류동 계곡이 속세와 범접할 수 없게 존재한다. 100년 만에 피어난 용설란의 신비로운 꽃대를 마주할 때처럼 가슴이 떨리고 엄숙한 기운마저 감돈다. 실로 위대한 자연이다.
자연만 위대한 것인가? 사람들도 대단한 일을 시도하며 역사문화를 꽃피워왔다. 팔만대장경이 그것이다. 꽤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일주문, 봉황문, 해탈문을 차례로 넘자 해인사 경내에 당도한다. 우아한 대적광전 뒤에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두 채의 건물을 찾아본다. 높은 계단과 담장의 호위를 받으며 두 마리 용의 형세로 자리하고 있는 위대한 집! 무슨 연유인지 가장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해인사는 여러 차례 화재를 입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잿더미로 변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데 장경판전만은 유일하게 500년이 넘도록 원래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목조 건물이 모여있는 곳은 한 건물에서 불이나면 바람을 타고 바로 주변 건물로 불이 옮겨 붙기에 이를 막기 위해 다른 건물보다 제일 높은 맨 뒤에 짓고 사방으로 완벽한 담장을 설치한 것이다. 조상들의 지혜에 또 한번 감탄하며 정해진 곳에서 살며시 판전 안을 살펴본다.
대장경의 경판수는 정확히 8만하고도 1258판에 이르는데 각 판에 새겨진 5200만자의 글자가 마치 한사람이 새긴 것처럼 뛰어난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하니 선조들의 정성에 머리가 숙여진다. 무엇보다도 그 방대한 경판을 과학적으로도 보관하기 위해 창살의 굴뚝효과를 생각해 내었고 회벽 등으로 햇살이 판전 안으로 적절한 양이 들어가도록 하였으니 깊은 은둔의 가야산도 주효했지만 그 옛날 아날로그 시대의 슬기로움이 오늘의 금과옥조가 되고 있다.
12월! 불이 가까워지는 시기이다. 불로서 인류역사를 꽃피웠다고 하는 한펀 그 불로 인하여 귀한 것을 한 순간에 잃게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장경이 년년세세 불에서도 멀리 강건하기를 바라며, 학교에 돌아와 여러 행사로 미뤄 두었던 소방대피훈련을 실시하기로 한다. 연막통을 구입하여 어느 장소가 훈련에 적합한가 협의하던 중에 방화문 작동도 확인할 겸 본관 2층 계단 방화문 가까이에서 연막통 심지에 불을 피워보기로 결정되었다. 학생들은 화재 발생처에서 멀리 안전하게 대피를 유도하고 관인함 등 중요문서반출은 교감선생님이 맡도록 하여 안내방송과 함께 훈련이 시작되었다. 기대반 염려반으로 모든 교직원이 역할을 나누어 맡고 움직이는데 연막통을 피우고 1분후 연기에 감지기가 작동했는지 육중한 방화문이 스스르 닫히는 것이다. 신기함으로 훈련은 실감나게 마무리되었고 모두 연습의 필요성을 체득하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안전을 위한 다양한 시설과 기구가 있어도 무관심속에 제대로 사용되지 않아 대형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영구히 보존이 가능하도록 힘써야 한다.
예서제서 불도 나고 문서유출, 갑여인의 횡포 등 나라 안이 시끄럽다. 내 나라는 세계 속에서 가라앉지 않고 장경판전처럼 우뚝 세워야 할 터, 누구누구의 잘잘못을 가려내느라 국력을 낭비하기보다 저마다 제자리에서 해인삼매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만 한 가지 ‘뿌린 대로 거두어야 함이 순리’이니 국민 된 도리를 생각할 제 특별히 억울해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