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재산환수 등 매듭짓지 못한 문제 많아
헌법에 쓰여진 일본식 표현 32곳이나 등장

[충청일보 이용민기자]충북도의회는 지난해 12월 19일 336회 정례회 3차 본회의를 열어 이광희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기 게양일 지정 및 선양 등에 관한 조례안'을 원안 의결했다. 이 조례는 일제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빼앗은 경술국치일(8월 29일)에 조기를 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의원은 "가슴 아픈 역사를 깊이 성찰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애국정신을 고양하기 위해 이 조례안을 발의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는 어찌보면 경술국치보다도 아픈 역사가 있다. 바로 을미사변으로도 불리우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1895년에서 두 갑자가 지나 다시 을미년이 돌아왔다. 광복. 1945년 빛을 되찾았지만 80년이 지나도록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일제의 그림자를 살펴봤다. 

 

▲ 서상국 광복회 충북지부 사무국장

◇걷히지 않은 친일의 그림자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은 올해로부터 꼭 120년 전인 1995년 을미년에 시작됐다.
우리나라가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된 시기는 1910년 8월29일 한일 병합 조약(韓日倂合條約)이 발효되면서부터지만 1895년 즈음 이미 국권침탈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공사 미우라의 지휘를 받는 2개대대 병력과 낭인들이 경복궁으로 난입해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자행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외국인 자객들이 청와대로 난입해 영부인을 살해한 사건으로 당시 조선이 병권과 치안권을 모두 상실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들로 구성된 단체인 광복회도 1895년을 독립운동이 시작된 원년으로 보고 있다. 광복회 충북지부 서상국 사무국장(67)은 당시 정세를 이렇게 설명했다.
"을미사변은 독립운동에 불을 당긴 상징적인 사건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는데 조선 정부가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청나라에 도와달라 청했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와 청일전쟁이 터졌다. 일본은 승전 후 그대로 용산에 군사기지를 차리고 조선 식민지화를 시작했고 그러다 일본이 청나라와 가까운 명성황후를 살해하면서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서 사무국장의 선친인 서대순 선생은 일제시대 신문사에서 일하다 투옥됐다. 풀려난 이후에는 비밀암살단에서 활동하다 다시 체포돼 옥고를 치뤄야 했다. 종로경찰서에 수류탄을 던지고 도주하다 남산에서 자결한 김상옥 열사가 함께 활동한 동지다.
"중국을 넘나들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고 하더라. 가족들에게 피해갈까봐 집에 들르지도 못했다. 해방이 되고 나서야 겨우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날 낳으셨다. 아버지와 쉰살 넘게 차이가 나는 이유다."
독립운동가 만큼이나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도 고달프다. 충청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 박자혜 선생은 1942년 영양실조로 작은 아들을 잃었다. 이듬해엔 자신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맏아들인 수범은 선친이 매국노라고 비난한 이승만 정권 때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서 사무국장의 집안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서 사무국장은 친일파 후손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것을 봐도 부럽지 않다고 했다.
"가족, 목숨, 재산 모두 버리고 바라는 것 없이 숭고한 뜻을 펼치신 게 자랑스럽다. 아무리 돈 많은 사람도, 국회의원, 대통령도 무섭지 않다. 누가 더 나라를 사랑하는지 따져보라."
서 사무국장은 해방 후 친일 청산문제를 명쾌히 매듭짓지 못해 우리사회에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친일파 후손들이 조상 땅을 찾겠다고 소송을 거는 건 정말 어치구니 없는 일이다. 일제시대 얻은 대부분 토지는 이미 팔아먹고 도로같은 자투리땅 정도만 남았다.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할 이들이 시민들이 밟고 다니는 땅까지 군침을 흘리니 화가 치민다."
민영은 후손은 2011년 3월 민영은 소유인 청주시 상당구 소재 토지 12필지에 난 도로를 철거한 뒤 반환하라며 청주시를 상대로 소송을 내 2012년 11월 1심에서 승소했다. 서 사무국장은 "선조들이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농간에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에 밤에 잠도 안왔다"며 "1인시위를 나섰는데 7월 뙤약볕도 힘들지 않았다"고 당시 심정을 토로했다.
광복회 충북지부는 시민단체와 함께 2만명의 서명을 받아 재판부에 제출하는 등 판결을 뒤집기 위해 힘썼고 지난해 11월 열린 항소심 재판부는 "문제의 땅은 친일재산으로 국가 소유로 귀속돼야 한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지난달 19일에는 법무부가 민영은의 미국 거주 후손을 상대로 낸 소유권 확인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하면서 문제의 땅은 국고 귀속 수순을 밟고 있다.
하나의 그림자가 지워졌지만 서 사무국장의 마음을 어둡게하는 또다른 그림자가 드리웠다.
"최근엔 건국절 문제로 맘고생이 심하다. 8월15일 광복절을 '광복절 및 건국절'로 하겠다는데 이건 친일인사들의 발상이라 생각한다. 헌법에 나와 있듯 우리나라는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기반으로 세워진 국가다. 당연히 건국절은 임정이 선 1919년 4월13일이다. 1948년 8월15일 이승만 정권 수립일을 건국절로 하자는 건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임정의 활동을 지우자는 수작이다. 건국절은 북한처럼 임정의 법통을 잇지 못한 곳이나 만드는 것 아닌가."
윤상현 새누리당 의원은 8월15일을 광복절과 함께 건국절로 기념하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개정안'을 지난해 9월2일 발의했다. 8·15에 담겨있는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를 함께 살려야 한다는 취지다.
그러나 건국절이 제정되면 '건국유공자 법'이 뒤따라 나오면서 정부수립에 공이 있는 친일반민족인사들의 '역사적 복권'도 가능하다.
윤상현 의원의 작은 할아버지인 윤종화씨는 일제시대 조선인 최초로 경찰부장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광복회 회원들은 매년 현충일처럼 경술국치일을 기념한다. 중앙공원 바닥에 앉아 찬밥을 먹을 때면 우리 선조들이 느꼈을 나라 잃은 설움이 뼈저리게 느껴진단다,
서 사무국장은 "요즘 사람들은 광복절은 잘 알지만 나라를 빼앗긴 날은 모른다"며 "어떻게 해방이 됐는지보다 왜 나라를 빼앗겼는지를 더 잘 알아야 또다시 비참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일제가 식민지 수탈의 한 방편으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청주시 흥덕구 사직공원내 천지신단.

◇일상 속에 녹아든 잔재

"이름만 들어도 알 A식당, B초등학교 강당, 친일인사가 퇴임 후 관거로 쓰던 건물. 명장사~성공회 뒷길 신사 흔적… 시민들이 무심코 지나치지만 일제의 잔재가 참 많아요."
이관동 청주시 문화재팀장의 말이다. 일제가 청주로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읍성을 헐고 사직단을 파괴한 것이란다. 한민족의 흔적을 지우고 일본을 새겨넣는 일이다.
충혼탑이 서 있는 청주시 서원구 사직공원에는 천지신단(天地神壇)이라 새겨진 비석이 있다. 얼핏 보면 우리 전통문화의 자취로 오인하기 쉽다. 그러나 이 비석은 일제가 식민지 수탈의 한 방편으로 조성한 것이란 주장이 유력하다. 신앙심을 유도해 민심을 통제하고 농업생산량을 늘리는데 활용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토착민들의 얘기에 따라 러일전쟁 때 전사한 일본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비석이라는 설도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에 따른 오해로 보인다.
일제는 청주의 사직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청일, 러일전쟁 때 전몰한 일본 군인을 위한 추모단을 만들었다. 주민들이 추모단 근처 천지신단비를 추모비로 착각할 만한 개연성이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충혼탑에 오르는 계단 어귀에 일제의 유산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거북스러운 일이지만 철거가 쉽지는 않다.
이관동 팀장은 "천지신단도 문제지만 사실 사직단 복원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어찌보면 일본군인을 추모하던 자리에 독립운동가·참전용사 등을 기리는 현충탑이 들어선 셈이다.
청주시는 청원청주 통합이 논의되면서 충혼탑 이전과 사직단 복원을 함께 검토했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접었다. 사직단이 들어서면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돼 반경 500m 이내 개발이 제한된다.
생활공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소통의 수단으로 삼는 언어에서도 일제의 잔재는 여전하다.
"어제 망년회 시마이하고 찌라시 보고 맘모스 호프 갔는데 주인이 유도리가 없어. 맥주를 한 다스나 시켰는데 서비스가 낑깡이 다야. 삐끼한테 잡혀 노래방 갔다 십팔번만 부르고 집에 갔어."
일상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일본식 표현들이다. 위 문장은 "어제 송년회 끝나고 전단지 보고 매머드 호프 갔는데 주인이 융통성이 없어. 맥주를 12개나 시켰는데 서비스가 금귤이 다야. 호객꾼한테 걸려 노래방 갔다가 애창곡만 부르고 집에 갔어"로 고쳐 쓸 수 있다.
기관에서 흔히 쓰이는 가압류, 가처분 등도 일본식 표기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감안(고려), 지분(몫) 등도 일본식 한자어다.
심지어 국가의 기본인 헌법에도 일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김문현 헌법재판연구원장(전 이화여대 로스쿨 교수)이 발표한 '헌법분야의 법률용어 및 법률문장의 문제점과 개선방향'에 따르면,  우리나라 헌법 조문에 일본용어·일본식 표현이 32곳이나 등장한다.
학교 입학식과 졸업식, 그리고 순국선열의 날, 광복절, 삼일절, 제헌절 등 주요행사에 빠지지 않는 '국민의례'는 일본 제국주의시대 궁성요배, 기미가요의식 제창, 신사참배 등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 비슷한 이유로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꿨지만 국민의례는 그대로 남아 있다.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은 "과거를 잊은 나라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 아픔을 곱씹고 가슴에 새겨야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서울시의회가 지난달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을 서울 지역 중·고등학교 585곳에 배포하는 사업이 포함된 '2015년도 서울시 교육비특별회계 세입·세출 예산안'을 통과시킨 것도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한 결정이다.
청원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마을에서 자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국민의 애국심을 환기하려거든 먼저 역사를 가르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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