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는 세상과 蔬通하는 꿈을 꾼다

그림 속 주인공 눈은 얼굴의 절반을 차지한다. 갸름한 얼굴 속 그 눈은 반쯤 감겨진 채 아래로 쳐져 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릴 것만 같은 처량한 모습이다.

주인공은 언제나 비옷이나 우산을 들고 있다. 어떨 때는 완벽하게 장화까지 갖춰 신는다.

'비비(bee bee)'. 외계인같기도 하고 만화 캐릭터 같기도 한 이 비비는 동양화가 김복배(39)의 분신이다. 충북 청원군 문의의 한 작업실. 살림집을 겸한 이 곳에서 작가는 100호를 넘나드는 대작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에게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이질적인 존재다. 전남 장흥이 고향인 그는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의 7남매 중 넷째. 가난뱅이 농촌살림이라는 게 밤낮으로 일을 해야만 겨우 밥숟가락 뜰 정도였다. 고교진학이 버거웠고 학업을 연장키 위해 국립기계공고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초등학교 시절 은사로부터 배웠던 붓글씨의 추억과 묵향을 잊을 수 없었다. 우연히 학교 근처 목계화실에서 강장하 선생의 극사실적 산수화 기법으로'추(秋)'자를 써내린 작품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화실에서 청소와 잔신부름을 하며 어깨너머로 붓글씨와 산수화를 배웠다. 선반기계를 전공하면서도 관련 자격증은 하나도 따지 못했다. 졸업과 함께 청주의 한 디자인 학원에 등록했다.

중학교 시절, 청주 이모댁을 방문할 때 양쪽으로 늘어선 가로수길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던 게 인연이 됐다.

군대를 제대하고는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다는 잠재적 욕구가 더욱 불거졌다. 서울 인사동과 강남 청주 등지 도시를 돌아다니며 광고디자인 업무를 배웠다. 그렇게 10여년 세월이 흘렀다.

김복배는29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대학에 진학했다. 학창시절의 묵향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거니와 며칠밤을 세워가며 작업한 디자인들이 설명기회조차 없이 의뢰인에 의해 휴지조각화되는 것이 참기 힘들었다. 순수그림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요동쳤다.


그렇게 시작한 만학도의 길. 한국화에 대한 그의 반전은 2003년 대학원 재학 시절의 조롱박 시리즈에서 시작된다. 장지 위에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조롱박과 그 주변을 스크래치(긁음) 기법으로 대조시켜낸 작품들은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는 어머니 자궁, 생명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계절별 생노병사의 과정을 천의 한 종류인 '샤' 위에 이미지화해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한 '능산적 자연' 시리즈는 상업디자인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작가가 이 시리즈에 천착하기 시작한 건 2005년. 가늘디 가는 1호 붓끝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이 서로 만나 연결을 이루는 과정을 아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것들 또한 각자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꽃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얘기한다.

굳이 꽃의 모티브를 이용한 것은 화려한 꽃잎의 이면 속에는 영양분을 공급하는 뿌리와 줄기, 또한 햇볕을 통해 광합성 작용을 하는 수많은 조직세포가 서로 연결된 거대한 흐름이 있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복배는 이같은 작업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놓아버렸던 인물화로 회귀한다. 2006년도 발표한 '욕망하는 기계' 시리즈는 여성을 상품화하고 있는 우리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성인용품 개발과 지나치게 쾌락주의적인 성욕 그리고 섹스…. 인간이 없어도 기계로 대체될 수 있는 현상들은 사회의 부속품화돼가는 사회를 고발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지금의 비비가 태어났다. '꿈꾸는 비비'는 결코 정통인물화가 아니다. 알 수 없는 사람들의 군상을 곳곳에 배치한 후 주인공인 비비를 부각 시켰다. 비비는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뭔가를 응시한다. 그것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기도 하고 강아지이기도, 허수아비이기도 하다. 온통 톤다운된 파스텔 색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비의 몸체는 작디 작다.

작가는 비비의 쳐진 눈을 통해 지나치게 시각화된 세상의 편견들을 풍자한다. 눈만 커지고 육체는 발달하지 못한 기형적 모습 또한 심각한 판단장애를 앓고 있는 요즘세상 모습이다. 화려함과 욕망뒤에 감추어진 고독과 소외감. 늘 고만고만한 삶속에 자신을 감추어 버려, 스스로 좌절하는 현대인들. 작가는 수많은 군상들을 등장시켜 개인과 개인, 개인과 세상의 소통단절 모습을 담아낸다.

비비가 입고 있는 비옷이나 들고 있는 우산, 장화는 누군가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 욕망이자 본능이다. 척박한 세상에 내팽겨쳐진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보호해 줄 뭔가를 갈망하는데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일깨워진 무의식적 욕망을 보여준다.

최근 등장하는 온몸에 줄을 매달고 있는 피노키오 비비나 줄인형 비비는 냉혹한 사회로부터 조정당하는 참혹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런 비비가 요즘 화폭 속에서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몸체가 화폭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색채 또한 보라, 노랑, 빨강, 파랑 등과 같은 과감함을 연출한다. 비비와 함께 등장하는 보일듯 말듯한 사과는 최소한의 사회양심이요, 현대인들의 용기이자 반딧불이같은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붓을 든 작가는 말한다. "우울하고 슬프지만 우리는 분명히 존재해야 한다. 비옷을 받아든 아이들이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처럼 그리움과 설레임이 사라지지 않는 세상이 바로 비비가 꿈꾸는 소통의 세상"이라고. /글=이성아기자·사진=노수봉기자


비비를 통해 일상의 소중함 화폭에 담아

작업실이자 살림집으로 연결되는 좁은 비탈길에는 아람분 밤송이 껍질이 뒹굴었다. 마당 한켠에 가꾼 텃밭, 아기 주먹만한 늦둥이 수박이 겁도 없이 마당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게 정돈된 집안, 바로 꿈을 꾸는 작가와 비비가 함께 사는 집이다.

△동양화가 맞나?

"(웃음)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했으니 동양화가는 맞나 보다.

△인물화라기 보다는 만화캐릭터 같다.

"정통화법을 벗어버렸다. 아예 인물화를 팽개친 때도 있었다. 맘껏 외유를 하다 보니 원점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비비는 새로운 인물화의 전형이다.

△근데 왜 우울해 보이나.

"모든 것이 넘치도록 풍족한 현대사회에서 오히려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소통의 부재라고나 할까. 타인과의 단절은 언제나 쓸쓸하다."

△비비가 언제쯤 밝은 웃음을 되찾을 수 있나.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비비의 존재가 점차 커지고 밝은 옷을 입다보면 눈도 올라가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질 것이다.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존중받는 세상,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바로 그날 말이다./이성아기자

작가약력

△1969년 전남 장흥 출생 △전북기계공고·청주대 및 동대학원 회화과 졸업 △신미술관(청주, 2003)·자인제노 갤러리(서울, 2006) 등 개인전 4회 △‘필운의 용전’(청주국립박물관,2002)·‘탐지하 는것, 감지하는 것’(청주무심갤러리,2002)·‘젊은작가 15인 선발전’(청주조흥문화갤러리,2003)·‘대한민국미술대전’(국립현대미술관, 2004)·‘단원미술대전’(안산 단원미술관,2004)·‘청주국제공에비엔날레 특별전-지역작가전’(청주첨단문화산업단지,2005)·‘한국화 지평전’(대전 우연갤러리, 2005)·‘문인화 정신의 오늘전’(서울 광화문갤러리, 2006)·‘다양성과 시대정신’(청원 대청호미술관, 2006)·‘제9회 한국정예작가 초대전’(안산 단원전시관,2007)·‘setec’전(서울무역전시컨벤션홀, 2008)·'blue ocean'전(중국 북경 좌우미술관, 2008)그룹전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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