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광섭칼럼

여기저기서 꽃이 피었다가 지고, 온 산천이 신록으로 눈부시더니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봄 꽃향기 그윽하던 그 자리에 또다시 붉은 노을이 물들고 있으니 세월의 덧없음은 말해 무엇하랴. 속절없이 스쳐 지나가는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 하지만 당신이 시간과 세월의 메타포를 찾아 방황하는 투어리스트라면 그것만으로도 사람구실 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변함이 없고 무미건조한 획일적인 삶이 아닌, 새롭고 창의적이며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인생의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만날 때마다 신선하고 새로운 멋과 맛을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에너지가 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가정과 사회는 늘 신바람 나는 역동적인 힘이 넘친다.
도시에 문화아지트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건강한 놀이와 문화, 건전한 소통의 중심이 문화아지트이기 때문이다. 놀이의 즐거움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로제 카이와는 그의 저서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의 정신이야말로 개인의 지적 발달과 정신교육에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놀이의 정신에는 자유와 창의력, 능란한 솜씨와 영민함, 그리고 대담성까지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위징아는 그의 저서 '호모루덴스'에서 어린이는 놀이를 성인은 여가를 즐긴다며 이는 정해진 시간, 공간의 범위 내에서 행하는 자발적인 행위 및 활동이라고 정의했다. 여가와 놀이·놀이와 문화가 창조적인 인간·창의적인 도시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소꿉놀이·숨바꼭질·팽이치기·눈싸움·가을 운동회 등 계절마다 또래들과 어울리며 놀수 있는 콘텐츠들이 늘 곁에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나름대로 규범과 질서가 존재해 즐기면서 세상사는 법도를 배우기도 했으며 놀이를 통해 새로운 꿈을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획일화된 놀이터나 장난감, 그리고 컴퓨터와 tv의 오락게임으로 놀이를 대신하고 있다.
인간의 온기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매정한 놀이만이 있을 뿐이다. 도시의 곳곳을 거닐다보면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만나는 것 같아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콘크리트 숲의 회색도시는 밤·낮없이 품어내는 네온사인과 매연으로 가득하고, 알코올에 온 몸이 젖은 이웃들의 거친 몸부림만 아득하다. 은밀하거나 어두운, 혹은 답답하거나 거칠기만 한 살풍경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매력이라고는 어느 한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개성도·낭만도 없이 살아가는 하루살이를 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도시에 사랑과 감동이 있는 문화아지트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한 마디로 우리들의 삶에 에너지가 될 수 있는 문화공간·감동의 공간이어야 할 것이다.
마치 내가 힘들고 괴로울 때 나를 위로해 주는 공간이어야 하고, 새로운 영감을 찾기 위해 방황할 때 인스피레이션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답답하고 무미건조한 삶에 놀이와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에너지 충전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길을 걷다 다리가 아프고 힘들어 잠시 쉬고 싶을 때 예쁘고 재미있는 의자가 있어 그곳에서 쉼표를 찍을 있는 도시, 사랑하는 사람과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을 때 노래와 춤과 다도가 함께하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온 가족이 혹은 회사에서 삼겹살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회식문화가 아닌 크고 작은 공연과 전시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더욱 좋겠다. 전시장에서 춤과 노래와 작품, 그리고 사람의 어울려 파티를 여는 그곳이야말로 문화아지트가 아닐까.
눈길 마주치는 건물마다 사랑과 감성의 디자인을 연출하고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면 도시 자체가 살아있는 문화아지트일 것이다.
온 가족이 역사와 자연의 숨결에 넋을 잃고 문화의 향연을 즐기고 가정마다 미술작품이나 공예품으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문화적인 삶이 아닐까.
청춘남녀는 도시의 협곡에서 은밀하고 즉흥적인 쾌락만을 쫓지 말고 문화공간을 찾아 시린 마음을 달래며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때 야무진 사랑과 멋진 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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