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편> 단양, 충청도 동학 포교 활동의 교두보

▲청풍호에 잠긴 신당리 장터. 1894년 봄에 이곳에 동학군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단양은 2세 교주 최시형이 태백산맥을 넘나들며 잠행 포덕하여 동학이 일찍이 유입되어 교도 활동이 활동을 했고, 용담유사의 간행지이기도 하다.

청풍은 강경파에 속하는 성두한(成斗漢) 대두령을 중심으로 교도활동이 성한 지역이어서 갑오년 봄에도 신당리 장터에서 동학 취회가 있었고, 9월에는 6천여 동학혁명군이 북산(北山장자봉)에 진을 치고 투쟁 활동을 벌였다.


# 샘골은 용담유사 간행지

1864년 3월,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로 대구에서 처형되자 최시형은 탄압을 피해 소백산맥을 넘나들며 교세를 확장시켜 나간다.

그렇지만 최시형은 1871년 이필제에 의해 주도 된 신미사변 으로 인하여 다시 관아에 지목을 받아 쫓기게 된다.

그 해 8월 이필제는 다시 거사를 모의하고 문경읍을 습격하려다 사전에 비밀이 유출되어 관군에 잡혀 처형을 당하게 된다. 최시형은 또 다시 관의 지목을 받아 단양 남면 가산리 정석현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한다.

일신에 위험을 느끼고 영월 정진일의 집에 숨어 있다가 소백산으로 들어간다. 이런 도피 중에도 단양 남면 사동(寺洞), 송두둑(葛川) 등지에서 홍순일, 김연국 등과 49일 수련을 하고, 설법제(說法祭)를 창설하여 도주인(道主人) 최시형, 차도주(次道主) 강시원(강수), 도접주(道接主) 유시헌(유인상) 3인이 개명하면서 동학의 지도 체제를 정비한다.

▲청풍관아에 딸린 팔영루. 1892년에 민란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各處道儒之來謁者不計其數(각처에서 수많은 교도들이 찾아오고) 라 하여 서인주, 황하일, 손천민, 손병희, 박인호, 안교선, 김영식, 김상호, 김은경, 윤상오, 여규덕, 여규신 등 충청도 동학 중심인물들이 최시형을 찾아온다. 말하자면 단양은 충청도 동학 포교의 교두보였던 셈이다.

이런 교세를 배경으로 최시형은 1881년에 단양 샘골여규덕(呂圭德)가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한다. 수운가사(水雲歌詞)라고도 불리우는 용담유사는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을 민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가사로 쉽게 풀어서 쓴 책이다.

갑오년에 단양 접주 민사엽이 이끄는 동학혁명군이 단양 군아로 쳐들어갔다. 군수 정의동을 축출할 계획이 있었으나 이미 알고 도망을 쳐서 관아의 아리 관속의 집을 파양했다 는 기록으로 활발한 동학교도의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 청풍ㆍ황간에 민란 &amp;amp;amp;amp;hellip; 안핵사 파견

임진(1892)년에 충청도에는 청풍 황간 두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나 조정에서 안핵사가 파견 된다. 두 고을 모두 현감의 탐학 사실이 밝혀져 파직으로 마무리 된다.

이는 조선 말기에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민란이 동학혁명과 결코 무관한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청풍 지역 동학교도의 활동은 어느 고을보다 성했는데, 성두한을 비롯하여 김용렴(金
用濂), 황거복(黃巨卜), 김영진(金榮鎭)과 같은 이들이 을미년에 재판을 받았다.

이 중에는 이방과 사령 신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지역의 동학 사적은 고을 전체가 청풍호에 수장되면서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 이면재 `일기` 통해 지역 동학활동 확인

1895년 3월 29일, 성두한은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김덕명과 함께 처형됨으로써 동학혁명의 막이 내린다.

성두한이 유일하게 충청도 청풍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많은 학자들이 그의 행적에 관심을 보였지만 구체적인 행적을 길이 없었다.

1994년 필자가 동학혁명 1백주년 기념 기획 취재 중에 수몰 지역인 월악산 아래 북노리 출신 유생 이면재의 &amp;amp;amp;amp;lt;일기&amp;amp;amp;amp;gt;를 발굴하여 성두한의 활동이나 이 지역 동학 활동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92년부터 민비의 지시로 시작된 공사는 동학 혁명으로 중단되었다. 월악궁터가 이 지역동학 혁명 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니 운동장 안에 묻힌 것을 발굴해야 하지 않을까.


&amp;amp;amp;amp;lt;일기&amp;amp;amp;amp;gt;의 주요 동학혁명 사적으로는 ① 월악산 아래에 이 지역 수탈로 이루어진 민비의 피난 궁터 공사 기록 ② 1894년 봄 신당장터 집회 ③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군의 퇴각 행로와 수탈 만행 ④ 갑오년 9월, 성두한이 동학교도들을 모아 장자봉(북산=北山)에 민간 보루를 쌓고 일본군에 저항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특히 월악산 아래에 민비의 지시로 피난 궁터가 대대적인 토목 공사로 진행 되었는데, 월악산 아래 송계 골짜기에 공사 인부들을 대상으로 엄청나게 큰 장터가 생겼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남한강을 통해서 들어오는 각종 목재나 석재는 그야말로 돈덩어리 였다는 것이다. 그 공사가 어느 규모로 벌여졌으며, 얼마만큼 공사가 진척하다가 중단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나마 송계 초 중학교 건물을 지을 때 월악 궁터의 사적을 모두 운동장에 매몰해버렸다는 것이다.

현재 운동장 가에 몇 개의 궁터 주춧돌만이 놓여있는데 이를 발굴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하다.

그리고 &amp;amp;amp;amp;lt;일기&amp;amp;amp;amp;gt;에, 갑오년 봄에는 신당(열두 신당리라 할 만큼 광범위한 자연부락) 장터에 동학교도들의 집회가 있었던 사실이며, 청일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 군사들이 청주 가도를 거쳐 충주로 들어와 강원도로 들어가면서 저지른 패악(悖惡) 사실이 잘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이 때 시골에 사는 백성은 거의 모두가 동학에 들어가 원수도 갚고 돈도 징발하는 등 마음대로 하는데, 어리석은 백성을 선동하여&amp;amp;amp;amp;hellip; 라는 기록으로 당시의 민심을 엿볼 수 있다.

▲용담유사 간행지 단양 샘골 약도.

비록 &amp;amp;amp;amp;lt;일기&amp;amp;amp;amp;gt;가 보수적인 유생의 편향적인 시각이긴 하지만 성두한의 행적이 잘 나타나 있는데, (성두한이)어리석은 백성들을 선동하여 산내 산외(청풍ㆍ단양ㆍ제천ㆍ영춘)에 무릇 6000군사가 모였다는 기록과 동학 접주 두한은 한 사람의 어리석은 백성에 지나지 않으나 모든 백성이 다 존경하니 이 역시 천운인지 알 수가 없다는 기록으로 성두한이 이끄는 군사력과 투쟁, 그리고 그의 사람됨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일본군이 한반도에 진출하면서 부산 낙동 안동 문경 가흥 이천 송파로 이어지는 전선을 가설했는데, 성두한이 이끄는 동학교도에 의해 수안보 부근에서 전선이 절단되었다는 기록은 주목할 만하다.

성두한은 정선 지방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채길순 소설가 &amp;amp;amp;amp;middot;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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