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땀으로 자수성가
'사심없고 큰 포용력' 칭송

 

[서울=충청일보 이득수기자] "햇빛이 쏟아져 내리던 운동장, 맑은 물이 사철 흐르던 미당천, 난로 옆에 쌓아 놓은 도시락 등 지금 와서 생각하니 마치 동화속의 그림 같은 날들이었어."

서울 정부종합청사 4층 대통령 소속 지역발전위원회에서 만난 이원종 위원장(73·사진)은 어린 시절 고향 제천에서의 추억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 위원장 세대는 대한민국 근대화를 몸으로 이끌어 나간 선구자들이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초등학생 시절을 보낸 그의 아버지 세대가 새나라의 초석을 놓았다면, 6·25 전쟁을 초등학생 때 겪고 가장 어려운 시절에 공부하면서 말 그대로 몸으로 자수성가를 이룬 세대이다.

"불 타 버린 집터 위에 짚을 엮어 세운 움막집에서 자는 것도 재미있었고, 미군 전투기가 폭격하는 모습을 흉내 내면서 신나게 놀다 어른들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어. 그러다가 일 년이 지나 흙벽돌 초가지붕의 교실이 새로 지어진 후에 만국기를 걸어놓고 맨발로 달리던 가을 운동회가 아직도 기억이 나요."
 

그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50년대 우리 농촌은 절대 빈곤에 시달리며 춘궁기, 보릿고개를 넘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규모가 있는 공장과 기업이 없으니 일자리가 없고, 국민 80∼90%가 농업에 종사할 시절이다. 어린 학생들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쇠꼴을 베고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낮에는 고된 노동을 해야하고 밤이 돼 석유등잔 밑에 책을 펴고 앉으면 곧바로 졸음이 쏟아진다. 이렇게 참 어려운 시절을 견디어 내느라 다들 힘겹게 살았다.
 

"인생에 희망은 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어린 시절 내 꿈은 서울로 가는 거였지.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닥친 현실은 사방이 가로막힌 산촌에서 농사일을 거드는 것 뿐이었어. 대학생이 된 시내 출신 동기생들이 집에 찾아왔을 때 나 자신도 모르게 심한 열등감과 패배감에 빠져들었어."
 

궁하면 통한다고 이 위원장에게 서울로 탈출할 기회가 운명처럼 다가왔다. 우여곡절 끝에 이 위원장은 수석을 차지해 20명만 선발하는 장학생으로 체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이후로 본격적인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장학금과 기숙사까지 제공되는 대학생활에 감사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체신학교 2년을 마치고 9급 공무원이 돼 발령받은 첫 임지는 광화문전화국. 맡겨진 일은 공중전화에서 동전을 거두어 오는 것이었다.
 

"파란 작업복을 입고 시내 곳곳 공중전화마다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봐 신경이 여간 쓰인 것이 아니었어. 우리 아들 서울 가서 출세했다며 자랑하시던 부모님 모습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치고 좌절과 분노가 느껴졌지."
 

체신학교 동기생 네 명이 모여 4년제 정규대학까지 공부를 더 하기로 하고,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 3학년으로 편입해 공부를 더하게 됐다. 그마저도 공무원으로서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해 행정고시에 도전하기로 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 하자니 영특한 머리로도 쉽지 않았다. 네 번 만에 제4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그 당시 일기에 "밟히면 밟힐수록 강인하게 되살아나는 잡초를 닮자"라고 썼는데 그 만큼 독한 마음을 품은 덕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고위 공무원 생활은 첫 발령지 서울시 공무원교육원를 거쳐 본청 행정과 예산과 기획과 계장·과장을 지내고, 서울시 내무·교통·주택·보건사회국장 등을 요직을 역임하며 관록을 쌓았다. 용산구청장을 시작으로 5개 구청장을 지낸 그는 50세 때 대통령 비서실 내무행정 비서관으로 발탁됐다. 얼마 후엔 충청북도 도지사에 임명돼 금의환향했다.
 

문민정부 출범 직후 전국의 시·도 지사를 교체할 때 그 역시 졸지에 실업자가 됐지만, 3일 후 김영삼 대통령이 전화를 했고, 서울시장에 임명됐다. 98년부터 8년간 민선 충북도시사를 지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들, 지식과 지혜까지 모두 다 돌려주는 것이 많은 사람의 행복을 책임지는 공인이나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자세야. 특히 공직자는 올바른 직장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에게 떳떳해야 한다."
 

이 위원장을 지금까지 지켜온 좌우명이 이것이다. 2006년 6월 충북도지사를 끝으로 공직을 은퇴했지만, 나라의 부름은 멈추지 않았다. 2011년 한국지방세연구원 이사장으로 자방자치의 기본인 지방세 연구를 총괄했고, 다시 박근혜 정부에서도 커튼 콜을 보내 현재의 지역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지방자치 발전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을 총괄하고 있다. 이 일을 맡은 것도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고향은 특정한 지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시골, 지역사회를 의미한다.
 

"지방의 발전을 위해 일하고, 소외받는 이들을 돕는 일은 공직자로서 큰 행복이고, 또 실제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는 이 위원장에게 그와 함께 일하는 공무원들은 '행정의 달인'이라는 칭송과 함께, "사심이 없고 포용력이 큰 분과 함께 일하게 돼 행복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 위원장의 걸어온 길을 보면 현실 인식이 정확하고, 목표가 뚜렷하며, 실천하는 자세를 갖췄다는 것이다. 성공하는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적인 모습이다. 쉬운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의지가 강해야 하고 자기자신에게 성실해야 하며 공정한 마음자세를 갖고 있어야 가능한 일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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