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작가 19 이종국


가을이 깊어간다. 이 땅은 사계절 모두 저마다 아름다운 멋과 향기를 지녔지만 오방색 물결로 가득한 지금이 유독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수많은 생명들이 바스락거리기 때문이다.
꽃이 피고 지며 녹음으로 가득했던 지난날의 추억을 뒤로한 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비움'의 존재로 가는 모습은 어느 노승의 뒤안길을 보는 듯하다. 그리하여, 다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스락거리는 자연을 통해 그동안 거칠게 살아온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용서하라는 메타포를 듣게 된다. 그 순간 나는 한 잎 낙엽처럼 자유로워진다.
닥나무 재배, 한지제작, 작품화를 거뜬히 소화
우리 주변에는 잊혀져가거나 버려지기 쉬운, 그렇지만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다. 특히 전통문화의 경우는 당장에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무한경쟁 사회의 경제논리에 밀려 명맥이 끊기고 사장위기에 처해 있어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국보 1호인 숭례문이 소실되는 뼈아픔을 겪고 나서야 부랴부랴 우리 것을 되돌아보고 보존과 창조적 계승을 위해 목청 높이는 것이 우리네의 현실이다.
충북 청원군 문의면 소전리 벌랏마을. 첩첩산중의 오지마을이 요즘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닥나무를 생산하고 한지를 만들며 다양한 작품을 창작하는 전통문화체험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하늘만 빠끔히 보이는 산골짜기, 6·25 전쟁이 일어난 사실도 모르고 지내올 정도로 외진 마을에 화가 이종국씨(46·사진)가 터를 닦으면서부터 한지마을로 명성을 얻고 있다.
이씨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한지를 생산하고 해학적이며 익살스러운, 아름답고 정감 넘치는 시골풍경을 그려 넣는 등 독특한 한지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벌랏마을에서 자라는 닥나무와 대나무, 자연에서 채취한 염료를 갖고 조명등, 부채, 손수건, 솟대 등 기예와 감성미 넘치는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 벌랏
한지는 씨앗을 심어 1년 동안 닥나무를 키운 뒤 가마솥에서 삶고 겉껍질을 베껴내야 하며, 닥풀과 함께 물에 풀고 뭉치며 두들기는 등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 이처럼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온전한 작품으로 탄생하기 때문에 닥나무 재배에서부터 생산과 작품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함께 하는 작가는 국내에 몇 명 되지 않는다. 이씨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마치 자신의 삶처럼 소화해 내고 있다.
한지야말로 흙과 불, 물과 빛, 자연과 인간, 음과 양이 함께하는 생명의 결정체라고 주장하며 15년간 이곳의 주민들과 함께 땀과 열정을 쏟아 붙고 한지의 가능성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간의 노력 끝에 소전리가 농촌 전통 테마 마을로 지정됐으며 마을 입구에는 ‘벌랏 한지마을’이라는 이정표가 세워지고 한지 체험장이 들어서게 됐다. 벌랏마을 주민들에게 한지의 복원은 새로운 희망이 된 것이다.
빛과 바람을 머금은 천년의 종이
한지는 천년의 숨결과 찬란한 문화를 묵묵히 간직하고 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가 1377년에 제작되고, 이에 앞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751년에 제작될 때 한지는 그 중심에서 한 장 한 장, 한 땀 한 땀 소중한 역할을 했다.
전문가들은 한지가 천년을 견딜 수 있고 국내외에서 널리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종이의 원료로 닥나무를 사용했는데 중국과 일본의 그것보다 섬유의 조직방향이 서로 90도로 교차하면서 질기고 균일하며 섬세한 입자를 형성하고 있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한 한지제작 과정에서 원료에 들어 있는 전분 단백질 지방 등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기술을 갖고 있으며 종이의 입자를 섬세하게 하고 얇게 뜰수 있도록 하는 독특한 기법을 갖고 있었다.

조상들의 슬기와 열정을 통해 생산된 한지는 우리의 삶 곳곳에서 소중하고 가치있게 사용되었다. 몇 겹의 한지로 만든 갑옷은 화살도 뚫지 못할 정도로 높은 강도를 갖고 있으며 창호지로 사용할 경우에는 빛과 바람을 통과시키고 습도를 조절하는 등 현대 과학의 산물인 유리보다도 실용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밖에도 한지는 쌀독, 등잔, 요강, 물통, 책 장, 찻상 등 생활공간 구석구석을 아름답고 윤택하게 만들고 있다. 중국 역대 제왕의 진적을 기록하는데도 고려의 종이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중국과의 외교에서 조공품으로 강요되는가 하면, 임진왜란과 일제시대에는 일본으로 대량 유출되기도 했다.
실용과 감성미 넘치는 한지작품에 몰입
60년대까지만 해도 벌랏마을은 한지만으로도 부농의 꿈을 일굴 수 있었다.닥나무를 재배하고 이것을 한지로 만들어 팔면 목돈을 챙길 수 있었고 이것으로 자녀들 대학을 보내고 시집장가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값싼 중국산에 밀려 한지의 명맥을 잇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촌로 한 분만 그 기술을 갖고 있지만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한지를 생산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래서 이씨는 한지에 더 많은 애착을 갖는다. 촌로가 살아생전에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한지의 맥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갖는다.
이씨에게 벌랏마을은 모든 것이 작품의 재료이자 소재거리다. 이 마을의 황토를 천조각에 물들인 뒤 다시 감물로 염색하면 예쁜 손수건과 이불보가 탄생된다. 작가는 이곳에 들국화와 구절초는 물론이고 살아있는 들꽃들을 물들이거나 붙이는 등 자연의 숨결로 가득한 작품으로 완성시킨다. 바람에 떨어져 나뒹그는 낙엽까지도 작가에게는 소중한 재료가 된다.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새와 나비들의 힘찬 날개짓과 산언덕에 즐비한 대나무도 작품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다. 한지부채 등 한지작품마다 벌랏마을의 자연미로 그윽함을 더해 준다. 이씨는 최근에 담배건조실을 활용해 손수 2층짜리 작업공간을 만들었다.
인공의 꿈을 보여주는 작업장이 아닌 벌랏마을의 때묻지 않은 모습을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지난 봄에는 한국공예관에서 이씨의 작품세계를 엿보고 잊혀져 가고 있는 문화유산의 가치와 소중함을 되새기기 위해 ‘벌랏마을 이야기_이종국 한지전’을 개최했다. 벌랏마을의 청정 자연이 한국공예관을 가득 메웠다. 방문객들마다 벌랏마을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깊은 감흥을 느꼈으며, 한지문화의 다양성과 무한가치를 만날 수 있었다. 한지가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세계화 전략으로, 우리의 찬란한 문화가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고 있는 것이다.
벌랏마을 이씨의 집 문지방에 앉아 있으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온통 자연뿐이다. 빛과 바람이 통하는 우리 종이 한지로 창과 문을 냈다. 햇살을 가득 머금은 한지 창에는 하늬바람에 닥섬유의 고운 결이 춤을 춘다. 마당에는 낙옆이 되어 나뒹구는 잎새들로 처량하고, 가지만 앙상한 나무마다 빨갛게 익은 홍시가 주렁주렁 햇살을 머금고 있다.
빛의 종이, 바람의 종이, 달빛 머금은 숨 쉬는 종이…. 하늘과 땅 그 가운데 작가 이종국씨는 늘상 한지랑 다정하게 웅얼거리고 있다. 보통 사람은 흉내내기 어려운 숨가쁜 노정을 걷고 있다.
벌랏마을을 뒤로 하고 먼지 풀썩이며 회색도시의 둥지를 찾아 나선다. 무심한 시선이 가을바람에 일렁이는 억새에 머문다. 억새밭에서 그리움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너의 아름다운 목소리, 흔들리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는 너의 지조를 만난다.
/변광섭 객원논설위원(청주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

작가프로필
◇서원대학교 미술교육학과 졸업
◇독일 뮌헨 toolwood summer festival 초대 워크샵(2003), 오스트리아 wchiberg에서 솟대, 터줏가리, 짚풀작품 설치(2003), 충북의 젊은작가 초대전(2008,한국공예관)
◇2008청주공예문화상품대전 은상
◇휴먼다큐 '벌랏마을 선우네'(2007, mbc), 문화다큐 '화가와 소전리'(2006, kbs)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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