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광섭칼럼

지난 주말에도 어김없이 상당산성을 다녀왔다. 옹기박물관에서부터 시작하는 등산로를 선택했는데 이른 아침인데다 밤새 비가 왔기 때문인지 등산객들의 발자국을 발견할 수 없었다. 스산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짙은 안개 때문에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 언덕을 계속 올라가야 하나. 날도 궂은데 괜히 시작한 것은 아닌가. 정상에 오를 때까지 쓸데없는 잡념으로 가득하다. 한편으로는 이처럼 자연과 하나 돼 교감하는 어떤 내밀함이 내 영혼을 맑고 순순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낭만적인 생각도 해 본다.
몇 해 전부터 상당산성을 오르내린 횟수는 어림잡아 100여회를 훌쩍 넘는 것 같다. 청주시민 치고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닐 것이다. 어느 새 나는 상당산성의 매력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일전에는 "따다닥따~" 딱따구리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어디 있는지 찾았더니 바로 인척에서 참나무에 구멍을 내고 있었다. 매서운 부리로 구멍을 파기 시작한 지 불과 몇 초 만에 어른 손가락만한 깊이의 구멍이 나 있었다.
상당산성의 새들은 이처럼 힘이 넘친다. 나뭇가지를 오가는 모습 또한 기운차다. 꼬마 녀석들이 놀이터에서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상당산성은 계절마다 아름다운 옷을 입는다.
대한민국의 산이라면 사계절 뚜렷하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상당산성만의 특별한 멋이 있다.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트리는가 싶더니 이내 목련꽃과 개나리꽃이 무진장 핀다.
꽃은 필 때 아름다워야 하지만 질 때도 아름다워야 한다고 어느 스님은 노래했다.
이곳의 꽃들은 정말이지 필 때 보다 질 때가 더 멋진 것 같다.
말없이, 깊고 느리게, 그리고 기약도 없이 사라진다. 철쭉이 화려한 유혹을 하기 무섭게 산 정상은 온통 푸른빛으로 가득하다.
솔잎향은 숲속에 숨어있던 바람과 함께 내 몸을 감싸준다. 싱그러운 향기가 내 몸 안으로 들어오니 내가 곧 산이다.
산성의 여름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투명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성곽 밑을 바라보는 재미도 뭉클하다.
울울창창한 숲 속에는 뭔가 신비스러운 신화와 전설이 있을 것 같다.
여름도 잠깐, 산성은 다시 붉게 타오르기 시작하는 데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고 겨울이 온다.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훨훨 벗어 버리고 알몸으로 겨울 하늘 아래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당당하다.
지난 밤 휘몰아친 눈보라에도 끄떡 하지 않고 순백의 미를 자랑한다.
밝아오는 여명에서부터 꼿꼿하게 솟아있는 한낮의 태양, 그리고 벌겋게 불타오르는 석양에 이르기까지 산성은 언제나 기운차고 아름답다.
정상에서 보는 청주시 전경은 또 어떠한가. 마치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용맹스런 장군의 형상을 하고 있다. 힘차고 당당하다. 그동안 내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옹졸하고 경거망동 했던지 부끄러움이 앞선다.
그리고 하나 더. 산성에 오르면 아주 특별한 공간과 가슴 따뜻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얼음골과 얼음골을 만든 중년의 아저씨다.
그는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 중턱에 얼음덩어리를 갖다 놓는다. 등산객들은 어김없이 이곳에서 청량한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
그는 산성에서 더덕과 칡즙을 좌판에 올려놓고 판매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최근에는 나무의자까지 손수 만든 뒤 등산객의 새로운 쉼터로 쓰게 했다.
개구쟁이 아이들이 그곳에 앉아 숙제를 하면 딱 어울릴 것 같은 앙증맞은 모습이다.
이쯤되면 그는 장사꾼이 아닌 예술가이자 생명운동가이며 아주 특별한 자원봉사자인 셈이다.
산성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얼음골 아저씨의 특별한 배려에 감동한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힘겨운 삶의 연속일 것인데 이웃을 배려하는 모습에 내 마음이 경건해 진다.
문득 내 몸이 닳아 이 세상의 한 모서리가 눈부시게 깨끗해진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어느 시인의 노래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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