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옥 동화작가·전 주중초 교장

"어머! 어떻게 이렇게 잘 자랐니? 정말로 고마워.", "똑바로 정신을 차렸어요. 뿌리를 더욱 깊게 내리고 밤엔 별님과 낮엔 해님과 놀았어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웃으며 필자를 맞아 준 고추가 고마워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약 한달 전, 집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조그마한 빈 터에 고추 모종 몇 개를 심고 바쁘다는 핑계로 돌봐 주지도 않다가 긴 여행에서 돌아 와 올라가 보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고추 모는 풀 속에서도 고개를 반듯이 세운 채 두 뼘도 더 자라 아삭이 고추를 몇 개 달고 필자를 맞아줬다.

그 동안 올라와 보지는 못했지만 참 미안했었다. 타들어가는 햇볕에 목이 말라 죽지는 않았는지, 진드기 같은 벌레가 갉아 먹지는 않았는지 걱정은 됐지만 뭐가 그리도 바빴는지 모르겠다.

식물도 사랑을 줘야 더 잘 자라고 다 때가 있는 법이란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고추 모는 두 뼘이나 더 자라 필자를 바라보며 자랑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기특했다.

못 다 한 사랑

얼굴은 긴 편으로 미소가 예쁜 길순이(가명)는 6학년으로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아이였다.

추운 겨울, 첫째 시간이 거의 끝나 갈 무렵에 교실 뒷문을 삐금이 열고 고개를 숙인 채들어 서는 아이가 있었다.

필자는 지각을 한 길순이를 보고 왜 늦었느냐고 다그치며 빨리 가서 앉으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숙인 길순이의 두 볼은 더욱 빨개졌다.

한 시간이 끝나고 나서야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죽을 끓여 드리고 오느라고 늦은 것을 알게 됐다."어머, 미안해, 길순아! 선생님은 그것도 모르고…." 바로 사과를 했지만 눈물이 핑 돌던 길순이의 두 눈망울을 필자는 아직도 잊지를 못한다.

가끔 떠오르는 해 맑은 얼굴의 길순이의 모습은 40년이 지난 오늘도 눈에 생생하다.

지금 길순이는 어디서 6학년 그때를 떠 올리며 아팠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선생님을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늘 미안하고 부끄럽다.
 
저 이렇게 잘 컸어요

불볕 같은 가뭄도 이겨내고 풀 속에서도 튼실한 열매를 맺은 고추가 더 반갑고 고마운 것은 항상 마음속에 남아있는 길순이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인을 원망도 않은채 잘도 자라 준 고추. 가뭄을 극복하고 병충해도 이겨내고 맺은 열매가 더 소중하고 달다는 것을 필자는 잘 안다.

이다음 길순이를 만나면 필자는 이렇게 인사를 할 것이다. "길순아. 고맙다. 어떻게 이렇게 잘 자랐니? 정말로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그러면 길순이는 이렇게 대답하겠지? "선생님, 괜찮아요. 저 이렇게 잘 컸어요." 요즈음 사람들은 힘들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힘든 때가 있기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불행도 다가 올 수 있다.

아픔을 이긴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한다.

"그래, 나는 얼마든지 해 낼 수 있어. 어떤 삶이라도 살아 낼 수 있다구." 위기를 이겨낸 고추가 준 교훈 앞에, 못 다 준 길순이에 대한 사랑을 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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