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민과 기쁨 슬픔 함께해 온 61년

영욕의 역사

충청일보가 3월 1일자로 창간 61주년을 맞았다. 충청일보는 지난 1946년 3월 1일 국민일보로 출발, 두 번의 제호 변경과 14번의 제호도안을 거치면서 발전을 거듭했고, 충청도민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왔다.

충청일보의 태동은 해방의 기쁨 속에서 도민의 의사와 역사를 담아야 한다는 뜻있는 언론인과 지역 유지들의 인식이 기반이 됐다.

해방전 동아일보지국장을 지낸 김동환 동아인쇄소사장과 일제하에서 기자로 활동했던 김창기 정운승씨가 당시 청주의 재력가였던 김원근씨를 참여시켜 해동일보 창립준비위원회를 발족하면서 충북최초의 지방지가 창간됐다.

당시 유일한 언론매체였던 동아충북판에 창간을 촉구하는 기사를 싣는 등 창간작업을 서두르던 끝에 김원근 천종구 백승휴씨 등 유력인사들이 출자하고 김동환씨가 인쇄시설과 사옥을 제공키로 합의, 마침내 46년 3월 1일 대동인쇄소(현 남문로2가)에서 한지에 인쇄한 타블로이드 2면의 창간호가 세상에 첫 선을 보이게 됐다.

이후 5호까지 발행한 뒤 인쇄시설 등의 보강을 끝내고 다시 2개월 뒤인 46년 5월 28일 제6호를 발행했다.

해방 이후 끊이지 않는 좌우 대립의 소용돌이 속에서 청주에서도 47년3월1일 좌·우파가 갈려 우파는 중앙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 기념식을, 좌파는 무심천에서 3.1독립기념식을 가졌다.

이때 좌파는 조직이 우세해 도내 전역에서 인원을 동원했으나 국민일보에서는 우파대회 공전의 성황이라는 제목으로 우파의 기념식을 크게 부각시키자 좌파의 격렬한 항의를 받아 당시 사회부장이던 김창기씨가 사표를 내는 사태로 이어졌다.

49년 1월에는 윤하영지사의 공금유용과 瀆職 사실을 폭로, 결국 윤지사를 물러나게 하는 등 도민의 권익대변지로 위상을 높였다.

뜻하지 않은 6.25를 맞아 대부분의 시설이 불타버리고 직원들이 피난을 떠나 장기 휴면상태에 들어갔으나 50년 9월28일 이광지사의 협조를 얻어 수복판 1만여부를 제작해 피난길에서 돌아오는 도민들에게 배포, 역경속에서도 사명을 다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시련도 있었다. 52년 5월 29일에는 김성수부통령이 사표를 제출한 것을 당시 통신부장 이응기씨의 수신 잘못으로 이대통령이 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잘못 보도해 이부장이 구속되고 관계자들이 연일 소환돼 조사를 받는 등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대통령 사퇴 오보로 구속

53년5월20일에는 대통령을 견통령으로 잘못 인쇄해 김창기편집국장 김진목편집부장 송경호정경부장이 구속됐으며 그해 11월28일에는 한일을 일한으로 잘못 표기해 결국 미군정법령제 88호에 의거, 창간 9년9개월(지령 2천2백92호)만에 폐간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폐간된지 4개월만인 54년3월1일 신문의 기틀을 완전히 세워 놓은 이도영씨가 사장에 취임하면서 제호를 충북신보로 바꿔 복간됐다.

이때부터 투자를 계속해 사세가 확장되었는데 56년 16면 인쇄기와 9pt활자를 구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신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60년 7월30일 신문 등 정기간행물 등록법 시행령이 공포되자 충북지역에서도 정기간행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간으로 사회일보 충북통신 주간으로 향건시보 충북문화신문 충북사진뉴스 충북의회보 등이 창간됐으나 대부분 시설이나 발행실적이 없었으며 5.16이후 정기간행물 정비 때 등록 취소됐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60년 8월15일 충북신보를 충청일보로 바꾸고 64년 10월 200만원을 증자해 충북출판사상 초유의 윤전기를, 65년에는 동판기 자동주조기를 도입해 새로운 도약을 하는 전기가 됐다.


"충북도 폐도 막자" 여론 선도

67년 12월 10일에는 충청북도를 없앤다는 폐도설이 전해졌다. 행정개편시안에 충북의 남부를 충남에 북부는 강원에 편입함으로써 충북을 없앤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충청일보는 즉각 모든 지면을 할애해 충북폐도를 반대하는 특집기사를 싣는 등 연일 관련기사와 사설 등을 게재하자 도민의 여론은 충청일보를 통해 분출되기에 이르렀고, 캠페인과 아울러 충북폐도반대투위가 결성되는 등 반대의 함성이 높자 이 안은 폐기돼 버렸다.

지난 73년 이도영 사장이 별세하자 이석훈 사장이 취임하면서 지역사회의 증인으로 사시를 바꾸고 새로운 도약을 다짐했다.

이석훈 사장 취임과 함께 시설투자에 중점을 두고 고속윤전기 도입, 현대식 주조기 증설, 신형 자모 구입 등으로 미려한 지면을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86년에는 격일제 12면으로 증면, 주 70면을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86년 8월18일에는 문화부 임병무차장이 창사이래 처음으로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임차장은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를 만들어 직지심체요절을 찍어낸 흥덕구 운천동 흥덕사지로 추정되는 훼손현장과 이를 둘러싼 학계의 움직임을 심층 보도해 문화재의 중요성에 대해 일대 경종을 울림으로써 그 공적을 인정받아 취재보도부문에서 한국기자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청주시 흥덕구 일대에 고인쇄박물관이 지어지는 단초가 됐으며 유네스코상 제정의 계기가 됐다.

90년 6월 9일에는 주 96면으로 증면을 단행하고, 7월 하마다고스 윤전기를 도입, 가동에 들어갔으며 91년 11월 26일에는 cts기를 도입해 7월부터 본격가동에 들어갔다. 이를 계기로 주조한 활자를 뽑아쓰던 식자시대에서 컴퓨터를 이용한 화려한 화상 출력시대를 맞게 됐다.

93년 9월 13일에는 김재휘씨가 대표이사사장으로 취임했으며 같은해 11월29일에는 지령 15000호를 발행하고 94년 7월 20일에는 기사 전산송출시스템과 노트북을 지급해 기사작성과 제작의 컴퓨터 시대를 열었다.

95년 8월17일에는 사진부 우상대 차장이 충주호 유람선 화재 현장을 생생히 보도해 사진부문에서 또 다시 한국기자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차지했다.

95년 9월 11일에는 조성상씨가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한 뒤 12월 1일 에는 하루 20면, 주 1백20면 체제를 구축했다.

97년 우리나라 경제에 뜻하지 않은 암운이 드리우면서 언론계도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는 시련이 찾아왔다. 전국적인 감축경영 회오리가 휘몰아치면서 많은 직원들이 이직하거나 다른 회사로 옮겨갔다.

96년부터 시작된 노동조합과 회사측과의 여러 협상은 합리적으로 정착되기도 했지만 둘 사이의 이견이 확대돼 장기 파업으로 이어지는 파행이 계속됐다.

2004년 11월 들어 이러한 분쟁 속에서 결국 충청일보는 발행이 중단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무려 2년 이상 지속됐고 충청지역의 뜻있는 많은 인사들로부터 외면 받는 사태를 불러왔다.


충청권 대표신문 도약 준비

이후 충청일보에 몸담았던 직원들은 오랜공백을 이기지 못하고 사분오열돼 충청권 다른 신문들로 자리를 옮겨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청일보는 여러 재력가들로부터 인수 의향을 받기도 했지만 기존 사주인 임광수씨와의 협상에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충청권 출향인사 가운데 언론사 경영 경험과 증권거래소 및 코스닥 상장기업의 대표이사직을 역임한 이규택회장이 전사주와의 장기간에 걸친 협상 끝에 충청일보 인수를 매듭지었다.

61년의 전통을 가진 충청지역 최고의 지방지를 이렇게 쓰러지도록 내버려둬선 않되겠다는게 이회장의 생각이었다.

충청일보가 처했던 위기 가운데 가장 길고 힘들었던 시간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이와함께 운천동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약 5억원대 중형컴퓨터 서버와 솔트웍스(주)의 news plus 신문편집시스템, 화상편집용 컴퓨터, 노트북 등의 도입이 이뤄졌다.

충청일보는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2007년 3월1일 마침내 61주년의 역사위에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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