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가 23 천미선


☆ 찻상세계로의 행복한 초대
산바람 강바람 마주쳐 억새꽃 휘날리는 오창들판을 달렸다. 눈을 감으면 솔바람 억새바람 향기를 맡을 수 있고, 눈을 뜨면 수천개의 은빛 억새들이 이리저리 휘날리며 바스락 거리는 모습이 찬연하다. 먼 길 달려온 햇빛은 갓 수확이 끝난 논두렁 밭두렁에 흩날리고 있고, 그 하늘빛이 너무 곱고 아름다워 발걸음 잠시 멈추고 들녘을 향해 고운 시선을 보낸다.
고즈넉한 한낮, 숲에서 들리는 청아한 새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거짓의 옷을 훌훌 벗어버린 숲에서는 구수한 흙냄새가 난다. 마른 풀잎들이 작은 바람에도 살랑살랑 거린다. 움직이는 것이 어디 바람뿐이겠는가. 살아있는 모든 것은 움직이고 흔들린다.
강물도 끊임없이 흐르고 뒷산의 오래된 소나무는 아픈 상처를 안고 사시사철 변화의 몸부림으로 가득하다. 이처럼 대자연의 모든 사물들이 흔들리는 것은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썩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도 어는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이상의 성장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 따뜻한 찻잔, 그윽한 차향
따뜻한 커피나 그윽한 향의 차가 생각나는 계절이다. 일회용 컵이나 투명한 유리컵 대신 도자기로 만든 예쁜 잔을 하나 마련하고 싶은 때이기도 하다. 차의 맛과 향은 코와 입으로 느끼고, 눈으로는 찻잔의 우아한 디자인을 감상하는 것이다. 웰빙이니 슬로우푸드니 뭐니 해서 퍽들 다도에 관심이 많다.
초겨울에 마시는 차맛은 새롭다. 한여름의 무더위를 지내고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곱게 익은 국화차와 지난 여름 한낮에 따내 발효시킨 연꽃(연잎)차, 그리고 화창한 봄날에 어린 아이 속살같은 작은 잎을 따낸 뒤 덖어서 잘 보관해 두었던 녹차를 꺼내 마시는 그 느낌은 한마디로 신비롭다.
찬바람이 불어와 만물이 생기를 되찾을 때 차 맛도 인생의 맛도 새롭고 멋있는 것이다. 찻잔의 종류도 가지각색이고 그 느낌 또한 천양지차다. 봄과 여름에는 백자가 산뜻해서 좋지만 가을과 겨울에는 분청사기나 갈색계통의 그릇이 포근하다.
☆ 다도는 절제된 아름다움이자 맑음을 지키는 일

다도(茶道)는 맑음을 지키는 일이다. 회색빛 콘크리트 숲에서 일상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깨어있는 정신을 갖게하는 최고의 예술이자 퍼포먼스다.
다도는 또 상호간의 눈뜸(開眼)과 소통이다. 사람은 저마다 따로따로 자기 세계를 가꾸면서 공유하는 법인데 차를 대접하는 사람이나 대접받는 사람 모두 하나되는 순간이다.
말이 없어도 맛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찻잔속의 미세한 울림으로 상대방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 흙으로 빚은 찻상, 자연미 물씬 풍겨

'茶陶同樂'. 차와 도자기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부부가 인연을 맺듯 소중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차 맛을 결정짓는데도 여러 가지 주변 환경이 필요하겠지만 그 중에서 도자기의 기능성과 실용미학에 따라 그 가치와 맛이 달라지게 된다.
도예가 천미선씨(44·사진)는 여성 특유의 민감함으로 찻상을 만들고 있는 젊은작가다. 청원군 오창읍 석우리에 ‘미선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작가는 흙으로 찻상을 빚는다. 물레기법으로 찻상을 만드는 작가는 국내에 여럿 있지만 물레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두드려서 찻상을 만드는 작가는 거의 없다. 이 때문에 지난 10월 서울의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천미선 휴(休) 찻상전’에서는 다인(茶人)들의 발길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작가가 도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지난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자를 전공하지 않았던 평범한 주부 천미선씨는 청주시 상당구 수름재에 있는 도림공방에서 김만수 작가가 생활자기 전시를 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호기심에 공방을 방문하면서부터 흙을 만지게 됐다.
작가는 공예는 곧 ‘쓰임’이라는 생각과 일상을 윤택하고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도자기를 빚고 싶어 도예에 입문하게 되었고 뒤늦게 청주대학교 대학원에서 도자를 전공, 2006년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학위논문도 도자찻상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이었다.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퇴수기와 찻상이 분리돼 있어 불편함을 느끼고, 찻상도 도자기로 빚은 것이 흔치 않아 실용미에 기능미를 가미시킨 찻상을 만들게 된 것이다.

작가의 이같은 생각은 곧바로 실천에 옮겨졌다. 퇴수기와 찻상을 하나로 묶은 찻상을 만들기 시작했고, 물레가 아닌 판상기법으로 새로운 도자문화를 창달하기에 이르렀다.
찻상 하나를 만드는데 한 달 이상의 시간과 많은 공정이 수반된다. 산청토와 중국 경덕진 백자토를 혼합한 뒤 도판을 밀고 수분을 없앤 뒤 재단을 해야 한다. 이어 재단된 것들을 조합하고 문양을 넣은 뒤 투각과 마감을 거쳐 초벌과 재벌을 해야 한다.
작가의 작품에는 자연미 물씬 풍기는 문양들로 가득하다. 모란꽃살문에서부터 국화문, 연꽃문, 나비투각, 연화어문에 이르기까지 그 기법과 문양이 변화무쌍하다. 하지만 작품마다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해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꽃을 닮고 꽃처럼 예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공방 한 쪽에는 갤러리 겸 다도공간이 있다. 방문객들에게 구수한 차향을 맛볼 수 있는 공간인데 작가가 직접 차를 대접한다.
찻상, 다완, 다기세트 모두 작가가 손수 제작한 것들이다. 굳이 작가의 것이 아닌 게 있다면 녹차나 보이차일 것이다. 차를 마시는 사람들은 작가의 따뜻함과 작품에서 풍기는 넉넉함, 그리고 그윽한 차 맛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공방 뒤쪽의 솔숲에서 흘러나오는 솔잎향과 새소리 바람소리가 문지방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어느덧 해는 서쪽 끝에 내려앉아 붉게 물들고 차를 마시는 사람과 작가, 그리고 작품 모두 하나가 된다. 각박한 세상에 잠시라도 세속의 때를 벗고 무념무상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행복한 동행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건너야 할 사막이 무수히 많다. 작가에게 건너야 할 사막은 무엇일까. 찻상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는 일, 디자인의 혁신과 창조적 과정을 밟는 일이 아닐까. 우리는 알고 있다. 진정한 스승은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깃들여 있다는 것을….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아쉬움이 많다. 그곳에서 작가의 작품과 차향을 온 몸으로 느끼며 자유의 몸이 되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다. 차창 밖으로 가랑잎 휘몰아 가는 바람소리가 내 손등의 살갗처럼 까슬까슬하다.<끝>
/변광섭 객원논설위원(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

작가 프로필
◇청주대학교 대학원 공예학과 졸업 ◇청주공예품경진대회 특선(2000), 국제다구디자인공모전 입선(2006), 충북미술대전 특선(2007), 백제문화예술대전 특별상(2007), 무안전국연관광상품공모전 동상(2008), 영남미술대전 특선(2008) ◇가나아트스페이스 기획전(2008) 등 개인전 1회, 충북공예기획전(2008) 등 단체전 20여회 ◇현재 청원군 오창읍 석우리 ‘미선공방’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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