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영 서원대 교수] 지난번 '유브갓메일' 속에서 대형서점 '팍스북스' 때문에 동네 '길모퉁이서점'이 문을 닫는 것을 보고 서점은 아니지만 나도 기업 형 슈퍼(SSM)가 아파트 입구에 생기자 어느새  길 건너 동네슈퍼에는 나도 모르게 발길을 끊게 된 것을 떠올리는 글을 쓰고 나서 바로 그날 저녁 우유를 사러 가게 됐다.
 
평소 같으면 아무 생각 없이 대형마트 체인 슈퍼에 갔을 텐데 '길모퉁이서점'을 외면하고 '팍스북스'를 찾는 사람들과 같은 내 모습이 느껴져 일부러 오랜만에 길 건너 슈퍼에 갔다. 대형마트나 체인점에는 할인 행사가 어느 한 가지 우유에는 늘 있는 편이어서 으레 할인하는 우유를 고르게 된다.
 
할인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왔는데 이 슈퍼에는 특별히 할인하는 우유가 없었다. 조금 비싸다 싶었지만 그래도 이왕 찾아왔으니 사가자 싶어 큰 우유를 하나 골랐다. 우유만 달랑 하나 사서 나가기가 그래서 둘러보니 밖에 크고 싱싱한 복숭아 박스가 보이기에 값은 보통 사먹던 가격보다 좀 비싸긴 해도 한 박스 사서 나왔다.
 
복숭아는 원래 손으로 만져보고 살 수는 없어 집에 와서 들춰보니 하나같이 안 보이는 쪽이 썩어 있었다. 겉은 초록빛이 돌 정도로 생생한데 보이지 않는 쪽에 하나도 예외 없이 썩고 상처가 있는 것을 보니 자연스럽게 오래 돼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상품성 없는 과일들을 모아서 파는 상품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속아 산 것에 화가 났지만 대형마트와 골목까지 침투해온 기업 형 슈퍼에 맞서 힘들게 생존경쟁을 하고 있는 기존 슈퍼의 입장을 막 생각하던 차라 차츰 안타깝고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모든 동네 슈퍼가 그런 것은 아니고 그 가게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리 우연이라도 그런 일이 있고 나니 다음번에도 길 건너 슈퍼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대형마트는 환경도 상품도 깨끗하고 위생적으로 관리되거니와 수요가 많으니 유통이 원활하고 오래된 것은 할인해서 떨이로 팔아 재고를 처리해 상품성이 잘 유지된다.
 
그러나 작은 가게나 재래시장은 갈수록 손님이 줄어들어 유통이 잘되지 않는다. 재고가 쌓이고 그러다보면 새 상품으로 빨리 교체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심해지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소비자입장에서 사회구조적인 불평등과 부당한 점을 이해하더라도 당장 지금 눈앞에 보이는 편리를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소규모 자본으로 운영하는 동네 슈퍼는 거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비자들에게 만족을 주기에 역부족인 면이 있다.
 
자연스럽게 서서히 대기업 마트로 옮겨진 마음을 기업이나 소비자에 탓할 수만은 없을 것 싶다. 그렇다고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니 동네슈퍼나 재래시장은 마트 강제 휴무일에 찾는 손님들에 만족하거나 기업 형 체인점에 순순히 자리를 내주어야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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