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수 충북대 건축공학과 교수] 양적 팽창의 시기로 지난 1945(해방 이후)~1961(전란 후)의 학교건축 복원기에는, 해방 후의 혼돈과 민족의 전쟁으로 인한 가난과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이 가장 시급했던 시기로 학교건축의 양적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중심으로 지역특성과 교육여건에 관계없이 단기간에 많은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한 획일화된 학교건축이 진행됐다.
1948년 8월 정부수립 후 경험과 예산이 부족한 정부였지만 교육목표만큼은 황국신민화 시대에서 벗어나 자주국민으로서의 교육목표를 추구했다. 그러나 이를 담은 교육환경은 일제시대 그대로 일 수밖에 없었고 발전을 도모하기도 전에 6·25전란으로 상황은 더욱 어렵게 됐다. 1949년 의무교육6개년계획 수립으로 1950년 6월 1일부터 실시하려던 의무교육은 6·25로 인해 중단됐으나 1952년부터 연차적으로 실시, 1959년에는 취학률이 96%에 달했다. 그러나 전란으로 인해 각급학교 50%, 시설기자재 80%가 손실돼 천막교실을 사용하는 등 교육환경을 구축할 여유도 없이 급증하는 학생수를 감당하게 됐다.
이후 1952년 교육자치제의 실시, 1955년 제1차교육과정 재정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파손된 학교복구에 이어 제한된 대지와 부족한 예산으로 교육목표, 교수·학습방법 등을 고려한 학교 건축계획은 생각할 수 없었고 단순히 늘어나는 학생 수에 대한 적절한 공간 확보만이 유일한 목표가 됐다. 충북 교육의 발전은 해방과 동시에 고등교육에 대한 관심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이뤄졌다. 1950년대 초 6년제 중등학교가 각각 3년으로 중·고등학교로 분리됐으며, 의무교육 6개년 계획의 시작으로 초등교육이 보편화되고, 60년대에는 초등교육이 보급이 완성의 시기를 맞았다.
1950년대 초에는 주로 시멘트 벽돌을 지역주민이 직접 제작해 시공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서양건축의 기술이 도입되면서 교사의 건축에도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건축물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나 대부분 조적조의 건물이 주종을 이뤘다. 1950년대의 교사건물의 특징으로 구조는 조적조이며, 목조트러스에 기와지붕 도는 함석지붕을 박공형태로 건축했다. 일자형의 편복도 형태이고, 난방이 되지 않아 난로를 주로 사용했다. 건물의 방향은 주로 남향을 향하고 있다. 교사의 형태는 중앙에 현관을 양측으로 학생들의 출입구가 설치되고 내부 바닥은 목재마루바닥으로 시공했으며 벽체는 회반죽 또는 시멘트몰탈과 수성페인트로 마감했다.
이 시기 충북에는 1945년 제천의림초와 단양중, 1946년 청주중앙초와 한벌초, 청주남중과 세광중, 제천고와 청주공고 등이 개교했고, 1951년 청주대성중과 충주충일중, 괴산고와 음성고를 비롯해 충북지역 대다수 지역의 초등 및 중·고등학교가 이시기에 신축됐다. 특히 전란중인 1951년 10월 증평공고 설립인가를 얻어 토목과와 건축과 각 1학급으로 개교했으며, 이것이 충북 건축교육의 시초가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