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그 뿌리를 찾아서 ①청년 윤봉길, 임시정부의 역사를 새로이 쓰다

▲ 중국 홍구공원 내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인 '매헌정(梅軒亭)'에 있는 윤 의사의 흉상.

'도시락 폭탄' 현장, 숭모의 기운 가득
의거 후 상해 임시정부도 큰 힘 얻어
"후손들에 위대한 역사 잘 알려줘야"

올해로 광복 71주년을 맞은 대한민국.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땅의 후손들은 일본의 잔혹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처절했던 독립운동 역사를 망각하고 있다. 특히 국외 독립운동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기억은 더욱 희미해지고 있다. 
이에 충청일보는 광복 71주년을 맞아 충북남부보훈지청과 함께 지난 7월11일부터 16일까지 5박6일 일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가 이동한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와 현주소, 미래에 대해 되돌아 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충청일보 신정훈기자] "100만 대군과 4억의 중국인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던 첫 날인 지난 7월11일, 중국 상해의 한 낯선 풍경의 공원을 방문했다. 도시락 폭탄 사건으로 알려진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인 훙커우 공원. 이곳을 들어서자 한 중국인이 익숙한 놀림으로 붓에 물을 묻혀 콘크리트 바닥에 윤봉길 의사를 칭송하는 글을 써내려갔다.

윤 의사 기념관인 '매헌정(梅軒亭)'에 들어서자 몇몇 중국인이 그의 흉상 앞에서 고개숙여 잠시 묵념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매헌은 윤 의사의 호이다. 공원을 한참 걸어가자 윤 의사의 의거 현장으로 추정되는 곳에 그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많은 중국인이 비석을 어루만지며 윤 의사의 업적을 적어둔 글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현장에서 본 중국인들의 모습에서 윤 의사를 숭모하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공원 곳곳에서 만난 중국인들도 한국인이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처럼 윤 의사는 중국인들에게도, 임시정부에서도 매우 특별한 존재다.

1932년 4월29일 일본의 전승기념행사가 열린 이곳에서 윤 의사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군 수뇌부를 향해 수통 폭탄을 던졌다.

윤 의사의 의거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파견군 대장이 숨지고, 군 수뇌부 다수가 중상을 입었다.

윤 의사는 의거 후 곧바로 일본군에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임시정부는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대륙을 떠돌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임시정부 자체 상황에 큰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윤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를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할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극찬했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선언을 하게 된다.

당시 임시정부는 내부적 혼란으로 월세조차 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지만 윤 의사 의거로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한국광복군까지 창설할 수 있게 됐다. 중국 공산당의 마우쩌둥 역시 저우언라이를 통해 임시정부를 지원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조선인 청년 한 명의 기개가 이국 땅에서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하던 임시정부는 물론 4억 중국인의 독립 꿈에도 불을 지핀 것이다.

김명철 서경중학교 교감은 "윤봉길 의사가 임시정부는 물론 중국의 독립운동사에도 거대한 역사를 새롭게 쓴 것"이라며 "국민당 정부의 지지를 끌어내면서 이역만리 타국에서 임시정부가 광복까지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런 역사적 현장을 보존하지 못한 것이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라며 "중국인도 존경하는 윤봉길 의사에 대해 우리 국민 스스로가 더욱 관심을 두고 노력해야 위대한 역사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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