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편> 충청-전라도 잇는 동학혁명사의 연결고리

금산은 동학 혁명의 최초 기포 지역이며, 동학혁명군과 보수 세력과의 공방전은 어느 지역보다 처참했다.

그리고 이곳 동학혁명군은 이듬해 1월 하순까지 일본군과 끈질기게 항쟁했다.

금산 지방 동학 사적은 초기 동학 유입, 1894년 3월 8일 금산 제원과 진산 방축리 봉기, 9월 재봉기 때의 공방전, 공주전투 패배 뒤에도 대둔산에서 벌인 최후의 항쟁과 일본군의 잔혹한 토벌 전 등으로 요약된다.

특히, 전라 충청의 동학혁명사가 별도로 다루어졌으나 금산 지역 동학사적을 보면 연결된 활동임을 알 수 있다.

▲1894년 3월 8일 제원 장터에서 봉기하여 동학혁명의 횃불이 올랐다.


● 1862년 상반기에 동학 유입

&amp;amp;amp;amp;lt;오하기문&amp;amp;amp;amp;gt;에 경주의 최제우가 지례, 김산 및 호남의진산, 금산 산골을 왕래하였다 고 했다.

이로 보아 금산지역에는 1862년 상반기에 동학이 유입되었다.

1887년에 이르러 황간의 조재벽이 입도하여 포덕을 시작하여 옥천 영동 청산 지역에서 포교 활동을 하다가1890년경부터는 금산 진산 고산 용담지역으로 범위를 넓혀 갔다.

1892년 11월에 삼례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나고민심이 동학으로 쏠리기 시작하면서 조재벽은 막강한 지도자로 등장한다.

1893년 2월 광화문 교조신원운동 때에는 많은 도인을이끌고 참가 하였으며,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와 전라도 원평에서 일어난 집회에도 많은 도인을 이끌고 참가하였다.

&amp;amp;amp;amp;lt;금산군지&amp;amp;amp;amp;gt;에 3월 8일에 무장한 동학군이 제원역에회합하여 이야면(李也勉)을 선봉장으로 5천여 명이 죽창과 농기를 들고 대거 금산읍에 들어와 관아를 습격하여 문서와 각종 기물을 불사르고 서리들의 가옥을 파괴했다 는 기록과, &amp;amp;amp;amp;lt;오하기문&amp;amp;amp;amp;gt;에 금(3월) 12일에 동학도수천 명이 몽둥이로 무장, 흰 수건을 두르고 읍으로 몰려와 관리들의 집을 불살랐다 고 하는 두 기록으로미루어 금산 지역 최초 기포 날짜는 3월 8일 혹은 12일이다.

전봉준과 손화중이 고창에서 기포한 날짜를 3월 18일로 친다면 금산 지역 기포 날짜는이보다 6일 내지 10일 정도 빨랐다.

따라서 최초의 기포 장소는 고창이 아닌 금산 제원 장터와 진산 방축리인 셈이다.
제원장터 동학혁명군은 이야면이 통솔하였고, 방축리에 모인 동학혁명군은 조재벽과 최공우 접주가, 그리고 금산 동학혁명군은 박능선 접주가 지휘했다.

동학혁명군은 금산 동헌을 점령하고 악질 관리들을 응징함으로써 성공적이었으나 10여 일이 지나자 보수 세력들이 진산 방축리를 점거한 동학혁명군을 반격한다.

&amp;amp;amp;amp;lt;수록&amp;amp;amp;amp;gt; 영기조에 4월 초 2일 금산 보부상 김치홍과 임한석은 읍민과 행상 천여 명을 이끌고 진산 방축리 동학도들을 공격, 114명을 육살 하였다 고 했다.

금산에는 6월 중순에 이르러 집강 업무가 시작되었는데, 최초로 집강에 차임된 동학도는 용담현에 사는 김기조이며 그 후임은 금산읍에 사는 조동현이었다 한다.

그러나 집강소가 금산읍 어디에 설치되었는지 장소는 알수 없다.

관찰사의 명령으로 동학군 집강소가 설립되자보수 세력의 저항은 한풀 꺾였다.

금산 민보군 수천 명과 동학혁명군 수천 명은 10월22일에 진산군과 금산군의 접경인 소리니재에서 대진한다.

22일 오후부터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승패가 나지않았다.

이틀간이나 대치했던 전투는 24일 오전 10시에동학혁명군이 총공격을 감행하자 민보군은 64명의 전사자와 많은 부상자를 내고 흩어졌다.

이렇게 위세를 떨치고 있던 진산과 금산 옥천 지역의동학혁명군은 뜻밖에도 11월 11일과 13일에 공주전투와청주성 전투에서 전봉준과 김개남이 대패했다는 소식이들리자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조재벽과 최사문,최공우 부자가 이끄는 동학혁명군은 끝까지 저항할 태세를 갖추었다.

▲갑오년 3월 폐정개혁을 요구한 민요 기록

금산과 용담 두 고을에 걸쳐 일어났다.
동학혁명과 연관성이 좀더 연구되어야 한다.


● 동학혁명군 게릴라 전법 구사

백목이 지휘하는 일본군이 11월 6일에 옥천을 거쳐 금산으로 방향을 돌려 제원역 동쪽 10km 지점인 양산마을로 와서 유숙하게 되었다.

동학혁명군 천여 명이 11월 8일 밤에 이들을 포위 야습했다.

맹렬한 교전이 벌어지자200m 전방 민가에 동학혁명군이 불을 질렀다.

주변이 환해지자 일본군은 동학혁명군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집중사격을 가했다.

1시간 여 교전 끝에 동학혁명군은 금산 방면으로 퇴각했다.


수적으로 월등한 동학혁명군은 일본군의 연발총을당해 내지 못했던 것이다.

금산읍으로 들어와 동학혁명군을 제압하자보수 세력들은 날뛰기 시작하다가 일본군이 물러가자 동학혁명군이 다시 나타나 활동하였다.

동학혁명군은 관군이 쳐들어오면 숨었다가 떠나가면 다시 나타나는 게릴라전법을 구사하였다.저항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근거지가 필요했다.

물색한 끝에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북서쪽 석도골 대둔산 미륵 바위에 초막을 짓고 항쟁에 들어간다.

1895년 1월 9일(양 2월 3일)에 이르자 충청감영은병력을 출동시켜 대둔산 동학혁명군을 공격하였으나 이틀간 체류하다 대책이 없자 진산으로 철수한다.

금산 의병장 김진용이 300명을 이끌고 왔으나 그도 역시 속수무책이었다.도리어 동학혁명군은 금산읍을 공격하여 영군을 불러들인 진산 군관 하경석을 처단하고 많은 병사들을 사살한다.

감영군은 이 소식을 듣고 소모사 문석봉을 다시 출동시켰으나 대책을 세워보지도 못하고 진산으로 물러난다.

▲이 마을에는 동학혁명 당시 금산 장터에서 세명의동학혁명군이 처형되어 같은날 제사를 지낸다


● 대둔산서 완패 &amp;amp;amp;amp;hellip; 염정동으로 후퇴

1895년 1월 23일에 신식무기로 무장한 장위영병과 일본군 3개분대가 대둔산에 도착하자 사태는 급전한다.

일본군은 24일 새벽 공격을 개시했다.

동학혁명군은 험준한 벼랑만 믿고 배후는 방심한 채 전방의 장위영병을 향해 발포를 계속했다.

이 틈에 일본군은 뒤쪽으로 잠복하여 불시에 돌격했다.

동학혁명군은 당황하여 어떤 자는 천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들었고 어떤 자는 바위 굴 속으로 숨었다.

살아남은 자는 모두 포박하려 했으나 장위영 병사들이 모두 사살하고 겨우 한 소년만 남겼다.

29세 쯤 되는 임산부도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접주김석순은 한 살짜리 여아를 안고 천 길의 벼랑을 뛰어 내리다 바위에 부딪쳐 즉사했다.일본군에 의해 대둔산에서 완패한 동학 지도부는 염정동으로 후퇴한다.

최사문과 최공우 등은 수백 명의 동학혁명군을 다시 모아 항쟁을 도모하지만 끝내 토벌되었다.


채길순 소설가 &amp;amp;amp;amp;middot;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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