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려면 먼저 비워야 한다. 가득 찬 곳에 무언가를 채우는 노력은 낭비에 불과하다. 넘치고 쏟아지며 버려져야 할 것 뿐이다.

또한 고여 있는 물은 썩게 마련이다. 늘 샘솟는 물, 새로운 에너지가 있어야 엔돌핀이 생기고 변화와 창조라는 시대정신을 담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채우려면 반드시 비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 고유의 삶과 멋, 전통의 하이터치가 세계시장에서 최고 수준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비우고 시대정신과 통섭 또는 융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이뷔통, 에르메스, 샤넬, 구찌 등 세계적인 문화상품은 그 나라의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의 랑데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음식도 그렇다. 음식을 만들고 담으며 연출하는 일련의 과정, 그리고 그것들을 폼나게 먹을 수 있는 안팎의 다양한 형식과 콘텐츠는 그 시대, 그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원형이자 오래된 삶의 양식이다. 그곳에는 솜씨와 정성, 아름다운 쓰임과 스토리, 디자인과 패션이 공존한다.

생활미학이자 오감이 즐거우며 맛있고 건강한 사랑이다. 눈으로 보고, 코로 맡으며, 입으로 느끼며,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종합예술이다.

성공한 음식과 그렇지 않은 음식은 문화적 가치 혹은 공예적 가치를 어떻게 표현했느냐에 따라 평가된다. 음식의 운명이 엇갈리는 순간이다.

몇 해 전 나는 영국 런던 여행길에 대영박물관 앞 일본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회전초밥 전문의 이 식당은 20여 평 남짓한 좁은 공간이었지만 20~40대 젊은 고객들로 앉을 자리가 없었다.

손님 모두 서양 사람들이었고 대나무발, 병풍, 달마 오뚝이 인형 등 일본풍이 물씬 나는 인테리어를 즐기고 있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기모노 차림을 한 채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고 음식 또한 일본식 도자기 목기 유리그릇을 사용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단순히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그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음식과 도자기, 장식품과 인테리어 모든 것이 일본식으로 꾸며져 있는 곳에서의 새롭고 낯선 문화충격을 즐기고 있었다.

최근에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한국인 식당을 찾았다. 그곳 역시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한국사람 뿐이었다.

김치와 불고기, 두부와 젓갈류 등 한국 맛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음식을 담는 그릇이나 인테리어, 종업원의 옷차림과 서비스의 행태가 엉망이었다.

한국인의 삶과 멋도, 한국적인 음악과 디자인도 없이 단순히 음식만을 파는 곳에 불과했다.

음식을 먹으면서 한국 문화의 향기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인데 돈 버는 일에만 혈안이었다.

음식을 생계수단이나 먹거리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네의 가엾은 모습이 어디 이 뿐인가. 대한민국에 있는 대부분의 음식점들이 국적불명의 음식문화에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다.

플라스틱류의 식기세트, 값싼 수입품으로 덧칠한 인테리어, 중국과 동남아의 공예품들, 문화이벤트는 고사하고 친절에 대한 인식조차 돼 있지 않는 천박함만이 있을 뿐이다.

음식문화에 대해 새로운 시선으로 접근하고 싶다면, 음식을 통해 한국의 문화적 수월성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브랜드화 하고 싶다면 비움의 미학부터 터득해야 한다.

돈만 많이 벌겠다는 알량한 상술부터 비워야 하고 지나치게 물량 중심으로 차려져 있는 음식물을 줄여야 하며, 전통적 가치에만 몰입돼 있는 고루한 사고부터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 우리 고유의 삶과 멋이 현대인의 다양한 삶의 양식과 접속할 수 있는 콘텐츠로 재편해야 한다.

음식의 내용에서부터 질적 혁신을 위한 표준화 작업, 그것들은 담거나 표현해 내는 '담음새'와 공예적 가치의 조화, 한국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인테리어와 건축물, 그리고 노래와 시와 춤과 옷매무새 등 다채로운 스토리로 새롭게 채워야 한다.

음식을 팔려하지 말고 문화를 팔아야 한다. 한국인의 사랑과 정성을 팔고 한국인의 삶의 에너지를 팔아야 한다.

한국의 음식에는, 한국의 문화에는 맛있는 사랑과 아름다운 스토리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 변광섭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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