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 시인·수필가

[김혜경 시인·수필가] 우리 집에는 철부지 녀석이 둘이나 있다. 물론 두 아들 녀석들도 애를 먹이긴 했지만 엄동설한에 꽃을 피우는 동백과 군자란이 여간 속을 태우는 게 아니다. 이틀 전 동백꽃 세 송이기 벌었다. 꽃잎이 얼면 어쩌나 베란다의 모든 문틈을 틀어막는다. 우리 집 월동 준비는 동백이 피고부터 시작이 된다. 날 풀리고 나서 피면 좋으련만 꼭 대한 추위를 앞두고 성급히 꽃을 피우니 한 아름 근심을 얹어준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저 여린 속살에 코트라도 입혔으면 좋겠다.

 내 젊은 날 한겨울에 짧은 치마를 입고 나서면 어머니가 지금의 나처럼 걱정을 하셨다. 젊다는 것은 거꾸로 가는 재주를 갖고 있다는 것인지 한겨울엔 짧은 치마를 입고 싶고 여름엔 긴 치마를 입고 싶었다. 종아리가 파랗게 얼어도 젊음의 싱싱함만을 내보이고 싶었다. 어머니 모르게 살짝 긴 코트를 벗어놓고 나오기도 했었다. 속 기운 펄펄 끓고 허벅지 탱탱하다면 아마 여전히 하얀 맨살을 내놓고 돌아다녔을 거라는 꿈같은 생각을 품어보기도 한다. 옷장 정리를 하며 입지 않는 코트를 버린다. '사람도 버리는데 이깟 코트쯤이야'라는 것이 내 변명이다.

 정말 코트 같은 사람들을 버리고 살았다. 누군가 내 곁에서 무겁게 어깨를 누르거나 마음의 상처를 준다면 그 사람을 피하고 만다. 곁에서 아옹다옹 다퉈서라도 관계를 개선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쉽게 안보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세상에 사람은 널려있고 인연을 맺고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실 친구는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새 이웃과 친구를 만들듯 겨울이 되면 가벼운 코트를 사러 다닌다. 재질도 좋고 모양도 예쁘고 참으로 가볍다. 그런데 덕다운을 사놓고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모직코트에 길들여진 세대의 사람이고 보니 빵빵한 눈사람 같은 옷이 설다. 결국은 옷장 구석의 차마 버리지 못한 낡은 모직 코트에 손이 가고 만다.

 그 옷은 정말 오래된 구식이다. 30년은 족히 되었다. 깃도 넓고 벙벙한 것이 길이도 길다. 버릴까 말까 왜 고민을 안 했겠는가. 버리려고 내놓았다가 다시 주워온 것을 보면 버릴 수 없는 옷이라는 얘기다. 어느 날 무섭기만 한 시어머님이 가족들 모르게 시장에서 사다주신 옷이다. 옷장 속에 숨겨놓듯 하다 보니 유행이 지나고 말았다. 가난의 설움과 시집살이를 나와 함께한 동료 같아서 마치 나 같아서 차마 버리지 못 했을 것이다.

 그 옷을 꺼내 입어본다. 어깨에 쌀섬이나 진 것처럼 무겁고 촌스럽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까맣게 잊고 살았구나' 그분의 엄한 꾸지람과 사랑이 아이들을 무탈하게 기를 수 있는 힘이 돼주었다는 것을 말이다. 된통 감기에 걸려보면 알지 않는가. 무겁고 구식이고 거추장스러운 코트가 내 체온을 유지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베란다에 나가 동백의 여린 속살을 바라보다가 젊어서 참 예쁘다는 말을 해주고 들어온다. 코트가 없어도 춥지 않은 청춘이 오늘은 부럽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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