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 시인·수필가

[김혜경 시인·수필가] 신이 인간에게 준 큰 선물이 망각이라는데 때론 그 선물이 탐탁지 않을 때가 있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데 기억 속에서 자꾸만 사라져가는 것들이 많아져 결국엔 어떤 기억만이 남을까 근심이 되기도 한다.

 지난 주말 문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첫사랑을 주제로 발표를 하고 시를 낭송하는 자리였다. 첫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억이 나지 않아서다. 첫사랑 이야기는 밤새워 몇날 며칠을 해도 부족할 것 같았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막상 나에겐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추억도 없었다는 말인가. 한번쯤은 꼭보고 싶었던 사람이고 내 시 속의 그리움이라는 주체가 되었던 사람인데 갑자기 아른거리는 신기루만 같다.

 사랑은 희망이고 누군가에겐 목표가 되기도 한다. 사랑이 없다면 정말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많은 사랑 중 첫사랑이 전해주는 의미는 또 다르다. 그만큼 오랫동안 기억 속에 머물다 간다. 남의 첫사랑이야기는 참으로 즐겁고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듣는 내내 눈물을 찔끔거리다 끝내는 펑펑 울다가 왔다. 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지, 왜 그리 슬퍼야만 하는지, ‘아직 저렇게 애절하게 기억하는 한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아 그런데 나는 왜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일까. 첫사랑을 잊어버린 것이 어째 내 역사를 잊은 것 같은지 모르겠다.

 요즘 도깨비라는 드라마를 재밌게 봤다. 레테의 강물 한 모금 마시고 이승의 기억을 잊는 것처럼 잘 생긴 사자가 끓여주는 차 한 잔 마시면 이승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설정이 참 기발하고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잘 생긴 사자가 차 한 잔 하라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기꺼이 기억을 지우고 돌아서지 않겠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망각의 차를 마셨나보다. 슬퍼했고 증오했고 비통했던 기억들을 스스로 지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봉인해 버린 그 기억의 빗장을 풀 의지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망각이라는 것이 매력 있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늘 잊는다는 것을 불경이라고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마어마한 지식도, 사랑도, 아이들의 탄생부터의 모든 역사를, 날짜를 번지수를 전화번호를 머리가 터질 만큼 기억 속에 꼭꼭 재워둬야 했다.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은 망각의 능력을 얻는 것인가 보다. 신이 내게 서둘러 주신 선물이라 해도 기꺼이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잊자. 잊으면 좀 어떤가.

 아픈 것들을 잊자. 분개했던 것들을 잊자. 슬픔이었던 것들도 잊자. 어차피 나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던 것들에 미련을 두어서 무엇 하겠는가. 기억의 소멸이 희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제 내게 선명한 것은 별로 남지 않았다. 흐린 시력처럼 마음도 흐리다. 어린 날의 기쁘고 슬펐던 기억들이 망사 커튼 뒤에서 아른거리는 것처럼 내 순수도 아른거리고 있다. 지난 한 해도 어느새 아른아른한다. 첫사랑도 아른아른 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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