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 시인·수필가

[김혜경 시인·수필가] 나는 개털이다. 개털이 된지 한참이 되었다. 돈벌이도 뒷배도 신통치 않은 그저 그런 노인이 되고 있다. 내가 백수가 될 무렵인가 강아지 한 마리가 내 집에 오게 되었다. 진짜 개털 뭉치가 말이다. 그때부터 사랑과 미움, 기쁨과 분노의 조절장애가 일어나는 것 같아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살 속을 파고드는 바람에서 봄냄새가 난다. 역시 계절은 때를 어기는 적이 없다. 입춘이 지났으니 곳곳에 봄기운이 스며들기도 했으리라. 봄볕은 내 강아지에게도 찾아 왔을 테고 어김없이 털을 뽑아내기 시작한다. 물고 빨던 사랑이 식는다. 제법 큰 개가 되었으니 뭉텅뭉텅 뽑힌 털이 거실바닥을 이리저리 바람 따라 몰려다닌다. 침대 이부자리는 물론 마시는 물 컵에도 음식에도 개털이 내려앉는다. 어디 한 곳 맘 놓고 엉덩이 붙일 곳이 없다. 외출하기 전에 테이프로 온몸을 찍어내는 한참의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의도치 않게 나는 늘 모피코트를 입고 다니게 된다. 그러니 성가신 봄이다.

 나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병원을 순례하는 것이 일과인, 재산을 모아놓지도 못한 부모인 나도 어쩌면 자식들에겐 성가신 개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만 겨우 공부를 가르친 것 외엔 아이들에게 해준 것이 없다. 해준 것이 없으니 큰소리를 치지도 못하겠다. 내 주장이 사라지고 목소리도 작아진다.

 우리 집에도 지하도 날바닥에도 공원에도 개털은 어찌 이리 수가 많은 것일까. 한때는 세상을 호령하던 우렁찬 목소리를 언제 잃어버린 것인지, 두려울 것 없이 활개 치던 두 날개를 언제 꺾어버린 것인지, 누군가의 든든한 뒷배가 되기도 했을 테지만 지금은 헐거운 몸 하나 받쳐줄 뒷배 하나 없는 성가신 개털들이 끼리끼리 몰려다닌다. 개털이 개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더는 춥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개털과 씨름하며 차라리 가출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극에 달했을 때 집에서 기르던 개의 털로 스웨터를 떠 입는 사람들을 TV에서 봤다.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털은 상상 이상으로 무진장 빠지니까 말이다. 청소기를 한번 돌리면 먼지 통의 반 정도가 찬다. 우리 집 개털을 지금까지 모았다면 스웨터 정도는 거뜬한 양이지 싶다. 색색으로 염색해 놓으니 개털도 저렇게 예쁜 옷이 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개털을 너무 하찮게 본 것은 아닐까. 세상에 그냥 태어난 것은 없다고 했다. 쓸모없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거리를 배회하는 소년들도 공원의 벤치를 지키는 어르신들도 쓸모없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집 강아지가 우울한 내게 기쁨과 사랑을 주고 든든히 집을 지켜주기도 한 것처럼 허리 굽은 저 노인도 누군가의 멋진 남편이고 연인이었을 테고 누군가의 태산 같이 든든한 부모였을 테고 누군가의 사랑스런 자식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사용가치가 사라지고 개털이 되었다고는 하나 언젠가는 개털로 지은 멋진 스웨터로 다시 재효용 가치를 보여줄 지도 모르겠다. 개털인 내가 올해에 새 일을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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