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영 서원대 교수

 

[황혜영 서원대 교수] 지난 연말 이사를 오면서 잘 안 쓰는 물건들은 좀 비우자 싶어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중 5, 6년 전 마지막으로 파리에 갔을 때 소르본 근처 지베르 조셉 서점에서 사온 프랑스 사진작가 로베르 두아노(Robert Doisneau, 1912-1994)의 탁상용 365일 사진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몇 년 동안 책꽂이에 꽂아두고 한 번 꺼내보지도 않았는데 그냥 버려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한 번도 안 쓰고 버리자니 아깝기도 하고 지금 너무나 다시 가보고 싶게 그리워진 파리 골목 풍경을 사진들로라도 보고 싶기도 해서 아예 올해 달력으로 쓰자 마음먹고 연초부터 달력을 책상 위에 세워두고 매일 한 장씩 넘기면서 보고 있다.

 어쩌면 두아노라는 이름이 혹시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는데, 파리 시청 앞에서 사람들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가 한쪽 팔로 여자 허리가 뒤로 휘어지도록 힘껏 감싸고 키스를 나누고 있는 젊은 두 남녀의 그 유명한 사진을 보면 아마도 "아아, 이 사진!" 하고 다들 알아볼 것이다. 막상 매일 넘기는 달력을 써보니까 처음에는 하루 한 장 넘기는 것도 제 때 못하고 어느새 며칠이 지나버릴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한 달 두 달 지나면서 사진 넘기는 일이 소소한 일상의 의식처럼 자동적으로 손에 익어갈 무렵, 마치 처음에는 어색하던 사이가 세월이 흐르면서 소소한 부분까지도 상세하게 떠오르는 친밀한 사이로 변해가듯이, 차츰차츰 달력 사진에서도 다음 장에 또 어떤 신선한 이미지가 펼쳐질까 하는 친밀감 섞인 기대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의 사진을 넘기면서 보다보니 어느 순간 생동감 있는 포즈와 살아있는 표정, 절묘한 타이밍의 움직임의 순간들이 어떻게 이렇게 고스란히 살아 숨 쉬듯 남아있을 수 있을까 하는 감탄이 들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는 것이 '우리가 곧 사라지게 된다는 생각에 대한 처절한 투쟁'이라고 하였던 두아노는 덧없이 스쳐 지나는 시간을 사진 속에 붙잡아두고자 하였다.

 달력 속에는 뒤라스나 콕토, 자크 타티, 아라공, 엘자 트리올레, 보부아르, 콜레트, 코코 샤넬, 쉬잔 플롱, 에디트 피아프 같이 유명한 사람들도 있고 어린 아기에서부터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부부까지 우연히 절묘한 순간 포착의 주인공이 된 일반인들도 많다. 그 중 배우이자 첼리스트 모리스 바케는 이 달력에 유일하게 여러 번 등장하고 있는 인물이다. 바로 며칠 전에 넘긴 <빗속의 첼로>(1957)라는 사진에서 모리스 바케는 부슬비가 내리는 파리의 거리에서 우산을 높이 펴들고 자기는 쓰지 않고 곁에 세워둔 첼로를 조심스럽게 씌워주고 있다. 두아노는 사진 옆에 정원사 아들이 성의 젊은 여인을 납치해가면서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정중하게 대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각난다는 내용의 유머러스한 설명을 붙여 놓았다.

 대부분 첼로와 같이 등장하는 모리스 바케의 사진들은 하나같이 우연인 듯 의도한 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절제된 구도의 시적인 느낌 속에 따뜻한 미소를 띠게 만든다. 사라져버릴 찰나의 감응을 따뜻하고 시적인 시선으로 살아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한 장 한 장 달력을 넘길 때마다 더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드는 두아노 사진의 매혹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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