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 충북여성문인협회장·수필가

[김혜경 충북여성문인협회장·수필가] 날이 갑자기 더워졌다. 지난여름의 찜통 속을 생각하면 벌써 겁이 난다. 설상가상 에어컨이 고장 났었던 여름이다. 올해는 일찌감치 에어컨을 장만했고 시름시름 앓는 냉장고도 손봐야겠다. 냉장실을 0도로 맞춰두고 있는데 영 시원하지 않은 것 같다. 수리를 불러도 이상이 없단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갔을 때 이상 없다는 말처럼 답답한 말은 없다. 냉장실에 온도계를 두 개 넣어두고 수리를 불렀다. 8도를 가리키고 있는 온도계를 내밀었더니 쭈뼛거린다. 온도계 숫자가 거짓말하겠냐고 했더니 온도계가 고장이란다.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더워지기 전에 새로 사야겠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으니 걱정이다.

 제발 고장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온도계를 넣었지만 이제는 분명히 고장이라는 것을 믿는다. 서비스 기사보다 숫자는 더 정확하니까 말이다. 세상 모든 것이 숫자처럼 분명했으면 좋겠다. 사랑의 무게도 미움의 무게도 혼돈의 무게도 저울에 달아 숫자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어찌 수치로 계산하려 하느냐고 한다. 인간미가 없다는 말이다. 나는 인간미도 수치로 계산해 내면 좋겠다고 했다.

 인간을 수치로 측량해 내는 세상을 어찌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고 하겠는가. 모든 선생님과 회사의 상사들도 능력과 인간성이 측량되어져야할 테니 세상은 공포의 도가니가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이런 두려움 때문에 세상의 악과 부조리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상을 하면 인간의 심성을 측량하는 저울이 사용되진 않아도 존재하긴 했으면 좋겠다.

 한 지인은 남편이 사랑의 표현을 하지 않아 답답하단다. 그래서 늘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달고 산단다. 남편은 반복되는 똑같은 질문이 얼마나 지겨웠을까. 이럴 때 저울에 단 묵직한 눈금을 보여주면 다신 귀찮은 질문을 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숫자 좋아하는 성미 덕에 올 어버이날에 두둑한 봉투를 받고 신이 났다. 마음이 중요하지 액수가 뭐 중하겠어하고 군자의 흉내를 냈다면 어림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속물 같은 행동에 은근 아이들에게 미안해지기도 하지만 신나는 하루였다.

 무조건 고장이 아니라고 우기던 서비스 기사도 온도계의 숫자를 보고는 움찔 한발 물러서던 것처럼 부정한 짓을 저지르고도 모르쇠로 오리발을 내미는 사람들도 숫자의 무게 앞에서는 벌벌 떠는 상상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기계가 사는 세상이 아니니 모든 것은 내 속저울로 측량할 수밖에. 제발 내 마음의 저울이 갈팡질팡 고장 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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